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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Dec 22. 2023

14. 겨울 밤, 3천 원짜리 족발


이맘때보다는 좀 더 추웠던 겨울로 기억한다. 강변북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 위로, 언젠가 SF영화에서 봤음직한 커다란 보름달이 성큼 내려앉았다. 지구로부터 몇 백 광년 떨어진 어느 행성에 존재할 법한 그런. 라디오에서 사라 장이 연주하는 쇼팽 녹턴 20번이 흘러나왔다.  


힘들었다. 그리고 외로웠다. 부모님 앞에서는 사업 잘되는 척 의기양양해야 했으며, 아내에게는 곧 나아질 거라 나조차 알 수 없는 미래를 다독여야 했다. 간혹 친구라도 만날라치면 어색하기만 한 과장된 몸짓에 돌아오는 길 더욱 가슴이 쓰렸다.

    

을씨년스러운 차창 밖 공기가 곧 매서워질 추위를 알렸지만 내겐 저 끝없는 차량의 행렬처럼 모든 것이 막막했다. 무심코 들여다본 백미러 안, 자신만만하던 나는 어디 가고 내 시선조차 마주할 수 없는 초라한 실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세상 사람들은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해 보였다.

    

동네 어귀 편의점. 3천 원짜리 족발과 천 원짜리 소주 한 병으로 흐뭇했던 사람냄새를 추억하고 싶었다. 아직도 아내는 7평도 안된다고 우기는 나의 집에 들어섰다. 빌라 2층 뒷 구석이라 하루종일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집. 싸구려일지언정 예쁜 옷과 먹거리를 외면해야 했던, 고단한 하루를 마친 아내와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아기가 희미한 불빛너머 쌔근거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비닐봉지를 열었다. 몇 잔을 들이켰을까.. 이맘때면 늘 그렇듯 녀석은 깨어나 고양이 같은 울음소리를 토해낸다. 잠에 취한 아내의 힘없는 토닥거림은 내 고통을 증폭시키는 울림이었다. 내 새끼라 그럴까, 아기 울음소리가 그리도 슬프다는 걸 처음 알았다.

    

목이 메어왔다. 굳게 입을 틀어막은 내 주먹 위로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칼바람에 떨리는 창밖으로 차가운 달빛만이 조용히 내 흐느낌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울 밤, 3천 원짜리 편의점 족발과 소주잔을 앞에 두고 웅숭그린 채 울먹이는 나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한번 터진 눈물을 제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척이나 추웠던 어느 해 12월이었다.

    

지금도 아주 가끔, 편의점에 들른다. 그 겨울밤이 생각날 때면 족발과 소주를 사기 위해 에둘러 찾아간다. 이제는 족발값이 8천 원이란다. 간사한 내 혀는 어느새 유명 맛집 족발에 익숙해졌지만, 차마 목구멍으로 넘기기 어려웠던 그때 3천 원짜리 족발이 이젠 내 몸속에 자양분이 되고도 남았음을 안다.

    

누구나 슬픈 날은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외로운 날은 찾아온다. 내 배가 따뜻할 때 겸손한 척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생의 바닥을 지나고 있을 때, 이 세상에 의지할 것이라곤 나 혼자라는 서글픈 현실에 가로막힐 때 자신을 추스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고개를 들고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 믿음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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