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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Jan 01. 2024

북한이야 남한이야?

아침 샤워를 마치고 민박집을 나섰다. 아바나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혼자 여행할 때 제일 홀가분하고 상쾌할 때가 바로 이 순간이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숙소 문을 나설 때, 아무런 간섭받지 않고 카메라 하나 들고 나설 때 말이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웬만한 비는 맞고 다니는 편이라 카메라를 재킷 안에 넣었다. 우선 눈에 보이는 큰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바나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 구시가지인 아바나 비에야 Habana Vieja, 상업지역인 센트로 아바나 Centro Habana, 신시가지이자 호텔밀집지역인 베다도 Vedado, 그리고 일반주거지역인 미라마 Mirama. 주로 아바나 비에야와 센트로 아바나에 관광객들이 몰린다.


아바나 비에야는 영어로 올드 아바나 Old Havana라고 불리는데 프라도 거리를 중심으로 혁명박물관, 국립미술관과 고급호텔 등이 늘어서 있고, 센트로 아바나에는 시청사를 비롯 오비스포거리에 각종 상점과 식당, 술집 등이 몰려있어 늘 북적북적한 곳이다.


아바나 시내를 걷다 보면 건물에 유독 열주 Column들이 많은걸 눈치챌 수 있다. 그래서 아바나는 한때 ‘기둥들의 도시 City of Columns’로 불리기도 했다. 바로크와 네오클래식 열주를 닮은 기둥과 포치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쿠바 혁명 이후 아바나 시내에는 몇몇 대형호텔들을 제외하면 새로운 건물들이 거의 신축되지 않았다.


돈도 없었지만 미국의 금수조치 탓으로 건축자재를 수급하기 어려운 게 큰 이유였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여기저기 부서진 건물 사이를 지날 때면 마치 막 파헤친 그리스 유적 사이를 걷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이는 꼭 아바나만 그런 게 아니다. 트리니다드, 시엔푸에고스, 산티아고데쿠바 등 다른 대도시도 마찬가지다.  


아바나는 1519년 스페인 정복자 디에고 벨라스케스에 의해 처음 설계되었다. 이곳은 중남미에서 유럽을 갈 때 꼭 거쳐가는 중간 기착지로 그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흔히 '삼각무역'으로 불리는 무역형태에서 쿠바는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총이나 옷 등 공산품을 싣고 서아프리카로 가서 이 물건들과 노예들을 교환하고, 다시 서인도제도나 북미로 가서 그곳 사탕수수 농장에 필요한 노예들을 내리고 설탕과 커피 등을 싣는다. 그리고 이 식민지 물자를 싣고 다시 유럽으로 가는, 그러한 과정의 중간루트가 아바나항인 것이다. 그래서 아바나는 열강이 끝없이 쟁탈전을 벌인 요충지였다.


스페인이 아바나를 설계했을 때도 가장 염두에 둔 것 중 하나가 바로 요새화였다. 항구의 생김새도 어쩌면 그렇게 방어에 유리하게 생겼는지, 마치 사람의 입 단면처럼 입구는 좁고 안으로 들어오면 넓어지는 모양이다.


<대서양 삼각무역>


‘까예 calle’라고 불리는 대로를 따라 걷다 보니 어디서 낯익은 글씨가 보인다. 한글이다. 한국 음식점 하나 없는 쿠바 길거리에서 한글을 만나니 무척 반갑다. 그런데 그 앞에서 글씨들을 읽어보니, ‘위대한 김정은 위원장 어쩌고…’와 더불어 김정은의 동정들이 벽보에 전시되어 있었다.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이다. 사진을 찍어볼까 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저 멀리 초소에 쿠바 경비병이 세상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에게 손을 흔들어 벽보 사진 찍어도 되냐는 제스처를 보냈다. 마침 입이 뒤집어질 정도로 하품을 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닫고는 ‘그러든가 말든가’하는 어깨 짓으로 화답한다.


사실 특별히 찍을 꺼리는 없었다. 단출한 2층집일뿐이었고 그나마 높은 벽에 가리워져 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공관이 더 음산해 보이고 적막감이 돌았다. 저런 곳에서 여러 명이 몇 년 동안 비비고 살면 어떤 느낌일까. 그것도 엄청 권위적이고 통제받는 분위기 속에서.


쿠바와 북한과의 관계는 각별하다. 쿠바를 돌아다니다 보면 쿠바 사람들한테 꼭 듣는 얘기가 있다. 순서대로 첫 번째, 너 중국인이지? 아니라고 하면, 그럼 어디서 왔냐? 꼬레아라고 하면, 북한이야 남한이야? 이건 거의 똑같은 레퍼토리다. 늘 남한이라고 대답하다가 (당연한 거지만), 북한이라고 할 때의 반응이 궁금해서 북에서 왔다고 해본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자 훨씬 더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형제라고 말하며 허그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전부터 둘 사이의 친밀한 관계도 관계지만, 어쩌면 가난하고 국제사회에 친구도 별로 없는 각별한 동병상련 때문이 아닐까. 사실 북한에서 왔다고 장난을 친 다음에는 다시 솔직하게 말하지만 그냥 떠난 적도 있었다. 얼마나 눈물 나게 반가워하던지, 도무지 뻥이었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울지 말라고 어깨 몇 번 쳐주고는 슬픈 표정으로 돌아설 수밖에.


물론 남한이라고 해서 적개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한류 영향으로 무척 신기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일수록 그런데, 연예인 만난 듯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쿠바 북한대사관 앞의 벽보. 쿠바 디아스카넬 의장이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은과 같이 찍은 사진이 보인다>


쿠바와 북한은 수교한 지가 벌써 60년이 넘었다. 쿠바혁명 1년 만인 1960년 8월에 수교를 맺고 아바나와 평양에 각각 대사관을 설치했다. 이때 혁명의 주축인 체 게바라가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회담을 갖기도 했다.


당시 혁명정부의 산업부장관이던 체 게바라는 북한을 쿠바가 향후 따라야 할 모델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하긴 그때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살 때였으니까. 1980년대에 북한은 쿠바에 무기를 무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피델 카스트로 역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면담했다.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 두 나라는 국제무대에서도 절친이었다. 최근에는 2021년 대통령급인 미겔 디아스카넬 국가평의회 의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이때는 쿠바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때였는데, 김정은은 쿠바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물론 쿠바 반정부시위를 지지하는 EU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하긴 남 일 같지 않았겠지.


쿠바는 1949년 대한민국을 승인했지만 1959년 혁명 이후 두 나라 국교는 단절됐다. 이후 우리나라는 박근혜정부 시절 처음으로 쿠바와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이후, 쿠바에서 열린 국제도서전이나 서울에서 열린 쿠바문화예술제에 서로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문화교류가 조금씩 있었다.


2018년에는 국제회의 참석차 쿠바에 간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양국 외교장관 회담을 갖기도 했다. 한국정부에서도 쿠바와의 관계개선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 쿠바와의 수교가 먼 얘기가 아니란 말도 있었다. 2022년에는 쿠바에서 연료탱크가 폭발하는 큰 사고가 있었는데, 우리나라가 쿠바에 20만 달러를 지원했고 한국 외교부 관리가 비공개로 쿠바를 방문해서 쿠바인사를 만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제 비가 완전히 그쳤다. 쨍한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다. 지저분하던 거리도 말끔하게 물청소를 한 듯 반짝반짝 광이 난다. 이제 카리브해 특유의 후덥지근한 습기가 올라올 것이다. 곧 쿠바 전국일주를 시작하는데 더위와의 싸움이 그려진다. 그전에 워밍업겸 아바나를 좀 더 돌아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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