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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Jan 08. 2024

삐끼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전국 일주에 나선다. 우선 첫 기착지인 시엔푸에고스행 고속버스를 예매하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쿠바에서는 도시 간 이동할 때 비아술 Viazul과 옴니버스 Ominbus, 그리고 뚜란스뚜르 Transtur 등과  같은 버스를 이용한다. 주로 내국인들이 이용하는 옴니버스와 달리 비아술은 우리나라로 치면 우등 정도에 해당하는 시외버스다.


하지만 최근에는 시설이 노후되어 가격 대비 만족도가 많이 떨어진다. 특히 이상한 것은, 아니 짜증 나는 것은, 예약을 위한 인터넷 홈페이지가 있지만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홈페이지에는 거의 대부분 자리가 만석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그걸 믿으면 안 된다. 직접 터미널로 가봐야 한다. 십중팔구 티켓이 남아 있다. (정확히 말하면 티켓이 아니라 예약증이지만).


게다가 터미널을 두 번이나 방문해야 한다. 한 번은 예약을 위해, 두 번째는 탑승을 위해. 한국에서처럼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탑승하는 날짜에 터미널로 바로 나가는, 그런 시스템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먼저 터미널 사무실에 방문해서 예약을 하면 예약증을 준다 (다시 말하지만 티켓이 아니다). 즉, 내일 아침에 터미널에 이 예약증을 들고 나와서 만약에 자리가 있으면 티켓으로 인정해 주고 없으면 못 타는 거다, 뭐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드는 궁금증이 있다. 그럼, 대체 왜 예약을 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전날 땡볕에 한참을 걸어 터미널까지 와서. 그냥 탑승 당일 날 나와서 확인하면 안 될까? 정답은, 나도 모른다. 암튼 탑승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단다.


탑승하는 날도 버스 출발 1시간 전 미리 터미널에 도착해야 한다. 예약증을 좌석표로 바꾸는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친 후 버스가 오면 타야 하는 시간을 감안해야 하니까. 고속버스 한번 타는 게 무슨 국제선 비행기 타는 것 같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상한 것은, 그렇게 바꾼 좌석표도 별 의미가 없다는 거다. 먼저 온 사람이 아무 자리에 앉으면 그뿐이다. 쿠바에 처음 온 관광객들이나 자기 좌석이라며 가끔 따지지, 두세 번 와본 사람이라면 누가 자기 좌석에 앉아 있으면 그냥 대충 알아서 다른 데 앉는다.


여기서 팁 하나, 자리를 앉을 때는 가급적 앞쪽으로 앉는 게 좋다. 내 경험상 비아술은 뒷좌석으로 갈수록 엔진 매연이 심하고 좌석이 많이 흔들린다. 좌석 등받이가 고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불량 좌석들이 왜 뒤쪽에 몰려 있는지는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아무튼 자리에 앉기 전 등받이 상태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재수 없이 그런 자리에 걸리면 몇 시간 장거리 여행 동안, 앞에서 택시 탈 때 말한 그 개 인형이 다시 되어야 한다.


차이점이라면 택시 개 인형은 머리만 흔들리지만 비아술은 좌석이 거의 180도로 눕혀져 상반신 전체가 흔들린다는 거다. 머리를 지끈지끈 쑤시게 하는 매연에, 끝없는 상반신 흔들림에, ‘어서 와, 차멀미 어디까지 해봤니?’, 아주 환상적인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터미널에 미리 도착해서 일찍 탑승하는 거다. 그래서 1시간 먼저 도착하라는 터미널 측 안내가 알고 보면 승객들을 위한 사려 깊은 배려였음을 깨닫게... 된다.


비아술 예약을 마치고 시청사인 까삐똘리오 Capitolio로 가기 위해 꼴렉띠보 Collectivo (합승택시)를 기다리기로 했다. 시내 나온 김에 그쪽을 한번 돌아보고 싶었다. 길가에 나 같은 외국인이 택시 잡으려 서있으니 온 동네 운전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온다. 두 번째 손가락을 쿨하게 좌우로 깔딱거리며 거절하고 있는데, 한 기사의 오토바이가 눈길을 끈다.


오토바이 옆에 작은 캐리어가 달린,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 라이 쿠더가 아들과 함께 타고 나오는 그 오토바이말이다. ‘찬찬(Chan Chan)’을 배경음악으로 둘이서 올드 아바나를 유유히 돌아다닐 때 탔던 그, 쿠바에 오면 꼭 한번 타보고 싶던 오토바이였다. 물론 현실을 깨달은 것은 타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지만. 여기는 어디? 쿠바로 들어오는 자, 모든 기대를 버려라!


우선 오토바이 옆에 붙어있는 캐리어 좌석이 주행할 때 엄청 요동친다. 운전기사는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손님은 그 캐리어 안에 카약처럼 타는 구조다. 그런데 밑에 나사가 헐거워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 생산될 때부터 그런 것인지 (물론 원래는 안 그랬겠지만), 캐리어가 엄청 흔들린다.


아무래도 쿠바에서는 모든 교통수단의 좌석은 일정 수준이상 앞뒤로 흔들려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모든 교통수단이 각도만 다를 뿐 이렇게 일관성 있게 흔들리는지. 특히 이 오토바이 웨건의 흔들림은 비아술 등받이 저리 가라다. 오토바이가 정지할 때마다 앞으로 고꾸라져 코가 거의 땅바닥에 닿았다가, 출발하면 다시 몸이 뒤로 -90도 꺾여 정수리가 뒤쪽 바닥에 닿아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아주 희한한 라이드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런 상태로 도로를 달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쩌다 몸이 정상적으로 바로 서 있을 때면 그 균형이 깨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신호등에 정지신호가 들어와도 오토바이가 그냥 신호 무시하고 달렸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게다가 헬멧은 왜 그리 작은 지, 평균적인 동양 남자 머리 크기에 전혀 맞지 않다 (물론 내가 평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 경우 마치 종량제 봉투 눌러 담듯 머리통 부분을 끙끙대며 눌러 담아 간신히 씌워야 했다. 결국 헬멧의 압력으로 뺨이 앞으로 밀려 입이 오리 주댕이처럼 튀어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헬멧 두께는 왜 또 그리 얇은 지, 사고가 나면 오히려 내 두개골이 헬멧의 보호장비 역할을 할 것 같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무척 빨리 도착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오토바이택시의 유일한 장점이긴 하다.


까삐똘리오에 도착했다. 아바나 중심지답게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까삐똘리오는 1959년 쿠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쿠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된 건물인데 미국 의사당을 본떠서 만들었다. 건물 가운데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까지 총 56개의 계단을 올라가니 (그걸 또 세어봤다) 커다란 두 개의 청동상이 반긴다. 이탈리아 조각가 안젤로 자넬리가 만든 동상인데 남성동상은 노동을, 여성동상은 선행의 수호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젠장, 안으로 들어가 보려 하는데 문이 잠겨 있다.


내부에는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대불,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에 이어 전 세계 실내에서 세 번째로 큰 조각상인 공화국 여신상이 있다고 하는데 아쉬웠다. 이 동상은 그리스 아테네 여신상을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고 한다. 그런데 서양인이 아닌 쿠바 현지인 모델을 찾다가, 마침 조각가 안젤로 자넬리 친구 아내가 혼혈이라 그녀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에 까삐똘리오의 자태를 다시 바라보니 여기가 미국 워싱턴인지 아니면 유럽 어느 도시쯤인지 헷갈린다. 그만큼 건물 자체가 웅장하고 깔끔하다. 하지만 길 건너편으로 눈길을 돌리면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색이 다 바래고 여기저기 누더기처럼 외벽이 떨어져 나간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폭격 맞은 전쟁터 도시 같다. 이게 바로 쿠바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 아닌가 싶다. 이상과 현실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주는 그런.   


 <사진: 카삐똘리오와 국립극장>


길을 가는데 백인에 가까운 뮬라또(흑백 혼혈) 한 명이 말을 걸어온다. 어디에서 왔냐며, 자신을 좀 도와줄 수 있냐는 거였다. 관광지에서 이런 경우 대개 사기꾼들이 많지만 어차피 급할 것도 없었고, 또 쿠바에서는 뭐라고 사기 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뭐냐고 물어보니 자기가 일본어로 타투를 하고 싶은데 글자 방향이 어떤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자 ‘개선 改善’을 꺼내 보인다. 그건 일본어가 아니라 클래식 차이니즈, 즉 번체라고 말하자 그는 정색하며 아니란다. 분명 일본어고 일본이 쓰나미를 겪은 후 재건사업을 할 때 그 ‘철학적 기반’이 바로 이 ‘개선’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오글거렸다. 철학적 기반은 개뿔. 어디 방파제 개선한다는 뉴스를 봤으면 몰라도. 나는 인자한 미소로 친절하게 그에게 설명해 줬다. ‘일본어가 그 기본을 한자에서 따왔다. 내 나라인 한국도 한자에서 그 의미를 가져왔지만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건 철학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고, 무언가를 새로 고친다는 리노베이션 같은, 그런 의미를 쓸 때 얘기하는 거다’라고.


그런데도 이 녀석은 막무가내다. 여전히 아니란다. ‘개선’은 일본의 ‘재. 건. 철. 학.’이란다. 자신의 인생모토이기하고. 그래 네 인생 모토로 삼는 것은 내 상관할 바 아니지만, 한 가지 조언을 주자면, 동양사람들 만나면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차라리 재미라도 있게 한글로 '쿠. 바. 사. 람'이라고 문신하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면 넌 최소한 한국사람들에게 인기폭발일 거라며.


그러자 녀석은 깔깔 웃으며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지만 자신은 이 ‘개선’이 가진 '철학'이 좋다고 한다. 대체 얘는 어디서 뭘 본 건지, 그리고 고집은 또 왜 이리 센 건지. 그래 그럼 그렇게 해라, 방향은 가로나 세로나 상관없다,라고 말하며  헤어지려는 찰나, 녀석이 또 나를 붙잡는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공연 잘하는데를 알고 있단다. 그거 나시오날 호텔 National Hotel에서 하다가 더 이상 안 하잖아 했더니, 아니란다. 저 앞 골목으로 가면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정말 잘하는 데를 자기가 안다는 것이다. 네가 나를 도와줬기 때문에 자기도 그 보답으로 알려준다는 것이었다.


진짜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녀석은 내가 관심을 보이는 줄 알았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말을 이어간다. “공연도 있고 또 좋은 시가 파는데도 내가 알고 있거든. 너 시가 좋아해?" 참... 어떻게 사기를 쳐도 이렇게 순진무구하게 치는지. 그런 녀석이 일본어 개선 어쩌고 하며 내 길을 막은 것이 그저 깜찍하기만 했다.


이미 발길을 돌리고 있는 내게 녀석은 계속 따라오며 자기가 공연을 대신 예약해 주겠다, 시가 더 싼 가격에 구해주겠다 등, 이제 본색을 드러내며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내가 돌아서서 말했다. "야, 사실 나 한국에서 타투이스트거든. 너 ‘개선’ 싸게 해 줄까?"라고 뻥을 쳤더니, 눈을 껌뻑거린다. "정말 싸게 해 줄게. 시가 값만 받고" 했더니 녀석이 하는 말, 자기 몸에 피나는 거 싫어한단다. 아냐 하나도 안 아파. 정말 싸게 해 줄게. 금방 끝나. 그랬더니 갑자기 엄청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뒷걸음질 친다.


결국 저 멀리 손을 크게 한번 흔들고는 ‘차오(잘 가)!’ 하고 인사를 한다. 쿠바 삐끼들이 대부분 이렇다. 아직 때가 덜 묻어서 그런 건가. 이런 순진함도 자본주의가 휩쓸면 곧 사라질 모습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짠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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