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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Dec 25. 2023

아, 인터넷


제임스형 집으로 건너가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그런데 말이 간단이지, 햄과 계란프라이, 빵, 과일, 그리고 커피까지 차렸다. 여기는 쿠바다. 햄이나 계란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특히 계란의 경우 간혹 길거리 지나가다 보면 한두 판 씩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배급소에 계란이 들어온 날이다.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보니 몇 달 만에 들어온 경우다.


그런 날은 난리가 난다. 가족들 모두 나와 머리에 이고 지고, 온 동네가 계란 파티 날이다. 햄 역시 마찬가지. 쿠바는 유통시설이 열악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햄 제조 능력이 발전했다. 보관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햄이 거의 고기와 다름없을 정도로 두툼하고 맛도 좋다. 하지만 자주 보기 힘들다. 그렇게 귀한 계란과 햄을 제임스형은 아낌없이 내줬다. 참 보면 뜬금없이 감동포를 날리는 사람이다.


식사 후 우리는 동네 에텍사(ETECSA)로 향했다. 에텍사는 전화와 인터넷 통신 관련 일을 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예전 한전과 비슷한 국영기업이다. 쿠바에서 인터넷을 하려면 카드를 구입해야 하는데 그걸 에텍사에서 판매한다.


1 쿡 (CUC: 대략 1달러. 나중에 다시 설명) 짜리 하나를 사면 1시간 동안 인터넷을 쓸 수 있다. 전화카드처럼 생겼는데 뒷면에 고유번호가 있고 그 밑에 즉석복권처럼 긁는 칸이 있다. 나름 비밀번호다. 그걸 긁어서 핸드폰에 입력하면 그때부터 시간이 계산되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


사실 1 쿡이면 쿠바 사람들 평균 월급이 40 쿡 정도 되니까, 우리나라에서 한 달 월급 400만 원 받는 사람이 인터넷 1시간에 10만 원가량을 쓴다는 소리다. 한 달이 아니고 1시간에. 카톡 몇 번 하고 인스타 좀 둘러보면 그냥 10만 원이 날아가는 거다. 그래서 사실 내국인보다는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가격도 가격이지만 이거 하나 사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다. 관광객이 몰리는 오비스포 Obispo 거리 같은 곳은 1,2 시간은 기본이고 심지어 4,5시간  기다릴 때도 있다. 그래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인터넷카드만 파는 사람들이 있다. 암표상과 비슷한 사람들이다.


그런 쿠바에서, 가히 ‘인터넷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생겼다. 카드를 사지 않아도 핸드폰에서 직접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심카드나 요금제로 이용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쿠바 인터넷 카드의 또 다른 불편한 점 중 하나가 특정 ‘와이파이존’으로 가야만 인터넷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었다. 그래서 밤에 가로등도 없는 컴컴한 공원에서 사람들이 몽달귀신처럼 핸드폰 불빛으로 얼굴만 비춘 채 모여 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 없이 편하게 자기 방에서 인터넷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어찌 혁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쿠바는 2018년 12월 역사상 처음으로 3세대 통신서비스를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3G망 구축 작업을 통해 정부기관이나 외국인 사업자, 관광객들에게 부분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해 오긴 했지만 국민들을 대상으로 전면적으로 실시한 것은 처음이었다.


서비스 요금은 Mb당 10센트. 패키지 상품으로 600Mb에 7달러, 4Gb에 30달러로 다른 나라에 비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말했듯이 월 소득 40달러 소득 수준을 감안한다면 보통의 쿠바사람들에겐 이것  역시 먼 나라 얘기가 된다.


따가운 햇살과 찌는 듯한 날씨에 숨을 헉헉거리며 에텍사에 도착했다. 제임스 형은 이곳이 관광객이 별로 없는 동네라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별로 믿진 않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략 열명 남짓이었다.


슬쩍 들여다본 사무실 안에는 두세 명이 일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길어야 이삼십 분 정도면 내 차례가 될 거 같았다. 제임스형 말이 맞을 때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삼십 분은 개뿔, 세 시간도 넘게 기다렸다.


쿠바에서는 어디를 가든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 날씨가 더워 줄을 서있기보다는 그늘을 찾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에 ‘울띠모(Ultimo: 줄 맨 마지막 사람)’부터 찾아야 한다. 특별한 방법은 없다. 그냥 ‘울띠모!’하고 소리치면 해당되는 사람이 손을 든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울띠모’가 되는 것이다. 내 뒤에 누가 와서 ‘울띠모’하고 소리치면 그때는 내가 손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이게 평생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엔 적응이 잘 안 된다. 내 경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시간가량을 땡볕에 서있다가 뒤늦게 ‘울띠모‘ 확인 안 한 것을 깨달은 적이 있다. 물론 그때부터 나는 ‘울띠모‘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누가 와서 ‘울띠모’를 외쳤는데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다가 나중에 아차! 하고 말해준 적이 있다. 물론 그동안 그 사람은 여기저기 애타게 ‘울띠모’를 찾아 돌아다녀야만 했고.


다행히 이번에는 그런 실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도무지 줄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날씨는 거의 화상 입을 정도인데 몸을 피할 그늘마저 전혀 없다. 게다가 쿠바는 습도가 높기 때문에 체감온도가 훨씬 높다. 기다리는 쿠바 사람들의 불만도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냉방이 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경비 직원은 문만 빼꼼 열고 거의 삼십 분에 한 사람씩 들여보내고 있었다.


그 문 앞에만 처마가 드리운 작은 그늘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문이 열릴 때마다 실내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난파 일보 직전의 배에서 필사적으로 출구에 몰려드는 것처럼, 나를 포함한 대기자들은 그 사무실 문 앞에 바짝 밀집해 있었다.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그 에어컨 바람에 어떻게든 닿아 보려고 말이다.


그러다 결국 우리 대기자 중 한 명이 경비 직원에게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는 것이었다. 줄 서기에 익숙한 쿠바 사람들이지만 지금처럼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이내 나머지 사람들도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이 상황이 흥미진진해졌다. 더위와 무료함에 지친 내게 싸움 구경은 단비와 같았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상황을 진행시킬지도 자못 궁금했다. 혁명을 한 사람들 아닌가.


<에텍사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하지만 결말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뭐라 타이르듯 차분하게 말을 했고, 다들 거기에 대해 마지못해 한두 마디씩 하고는 잠잠해졌다.


그 결과는, 전화 요금 내는 줄, 인터넷 줄, 그리고 잡다한 다른 업무 줄 등 세 갈래로 나눠 서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통신사에 전화하면 안내 나오는, 전화목적에 따라 1,2,3번 누르라는 것과 대충 같은 분류였다. 이들은 너무도 현명하게 자본주의 서비스를 체득하고 있었다.


나는 실망했다. 사실 난 이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문을 부수고,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 책상과 문을 집어던지고, 곧이어 이성을 잃은 한 남자가 불을 질러 결국 경찰과 소방차가 출동하여 진압하고,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몰려와 그동안의 느려 터지고 비효율적인 행정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서 폭동으로 이어지며, 그 폭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결국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그래서 다시 새로운 혁명정부가 탄생하는, 그런 역사적인 현장의 중심에서 모든 상황을 카메라와 글로 기록하는 목격자가 되는, 그런 기대 말이다.         


“꼬레아에서도 이래?” 내 앞에 서있던 건장한 흑인이 나의 멍청한 상상을 끝냈다. 나는 짧은 스페인어로 답했다. “아니, 우리는 이런 거 노! 인터넷, 똑똑똑”하며 손가락으로 타이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스페인어라기보다는 바디랭귀지였지만.


그러자 나의 답을 호기심 있게 기다리고 있던 주변 쿠바 사람들이 눈과 입을 동그랗게 말며 일제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중 한 여자는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어쩌고 저쩌고, 꼬레아..” 느낌상 ‘역시 인터넷 강국, 꼬레아..’ 뭐 이런 의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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