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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Jan 12. 2024

16. 화장실 스머프


장인어른이 병원에 계시던 2020년의 일이다. 병원 화장실로 중딩아들이 먼저 들어가고 나는 잠시 후 녀석을 따라 들어갔다. 화장실 안에는 전부 3개의 좌변기칸이 있었다. 가운데 칸 아래에서 발이 움직이는 걸로 봐서 난 녀석이 그 칸에 들어갔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 옆, 굳이 번호를 매기자면 1번 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번 칸에 있는 녀석을 놀려주기 위해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스머프 주제곡, “랄랄라랄랄라 랄랄랄랄라~"


한참을 노래했는데도 옆칸의 녀석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난 다시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불렀다. "랄랄랄랄랄 랄랄랄랄랄~!!" 하지만 역시나 반응이 없었다. 녀석이 내가 누군지 모르고 겁을 먹었나? 나는 아들을 안심시키고 내 정체를 밝히기 위해 옆칸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걸었다. "헤이, 치타”. 우리끼리 하는 농담이었다. 타잔에 나오는 그 원숭이 치타말이다. 내가 아들 녀석에게 종종 '가자 치타!'라고 하던. 그런데 웬걸? 그래도 녀석은 반응이 없다.


나: "치타!"  


옆칸: "...."


나: "치타!!"


옆칸: "....."


나: "치타??"


옆칸: "....."


나: "가자, 치타!!"


옆칸: "............."


그때 계속 침묵을 지키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 황급히 화장실을 뛰쳐나간다. 너무 급하게 나가느라 손도 안 씻고 나간다. 나는 큰소리로 녀석을 불렀다. "치타, 가냐!!" "손은 씻고 가라 치타!!"  


내가 좀 심했나.. 아무래도 사춘기 중딩녀석은 아빠가 너무 창피해서 뛰쳐나간 것 같았다. 화장실엔 우리밖에 없는데도 참네. 싱거워진 난 주섬주섬 일어나 1번 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난 얼어버렸다. 저쪽 3번 칸에서 나오는 건... 아들 녀석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좀 전에 뛰쳐나갔던 2번 칸은...???


난 아들에게 말했다. 야, 가운데칸이 너 아니라고 아빠한테 말을 했어야지! 그랬더니 녀석이 받아친다. 아 아빠가 한 칸 건너있는데 내가 뭐라그래! 옆에 딴사람도 있는데 아빠가 왜 저러는지 나도 창피했는데!


2번 칸의 그 사람은 어디 가서 분명 이 얘기를 할 것 같다. 병원 화장실에 갔는데, 어떤 미친놈이 옆칸에 들어와 한참 동안 스머프 노래를 발랄하게 부르더니 갑자기 자기한테 '치타'라고 불렀다고. 계속 참고 있는데 결국 그놈이 '가자 치타' 하길래 아무래도 자신을 해칠 것 같아 뛰쳐나왔노라고. 와이프에게도 한소리 들었다. 그 사람 얼마나 무서웠겠냐고. 다시는 공공장소에서 장난치지 말라고..


저, 죄송합니다. 2020년 12월 30일 저녁, 강남세브란스 병원 지하 뚜레쥬르 옆 화장실, 사과드립니다..그나마 장인어른이 이 얘기로 빵 터지셔서 눈물까지 흘리시며 웃으신 걸로 만족했다.


아들녀석과 함께 간 동물원에서 카피바라와. (스머프 사진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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