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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Jan 11. 2019

08. 대설부, 눈을 기다리며

        

살면서 뜬금없이 생각나는 음악이 있다. 이 노래도 그 중 하나. 옛날 MBC에 '베스트셀러극장'이라는 시리즈가 있었다. 주로 국내 문학작품들을 드라마화해서 보여줬는데, KBS의 'TV 문학관'과 더불어 내가 좋아하던 프로였다. 그 시리즈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가 <대설부 待雪賦>.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87년 1월에 방영했던 걸로 기억한다. 눈을 기다리는 시? 노래? 정도로 번역되려나. <사월의 끝>이라는 한수산의 단편집에 실려있던 소설을 극화한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내용은 대충 이렇다. 건축가였던 형의 장례식에서 형의 애인을 만난 남자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한다. 거부해야만 하지만 빠져드는 두 사람. 드라마에서는 내내 그 아슬아슬하고도 미묘한 감정선을 오갔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리고 그들의 인연은 마침내 기차역이라는 공간에서 절정을 맞는다. 만남과 헤어짐, 정방향과 역방향이 공존하는 기차역의 역설 같았다.

        

눈 내리는 황량한 시골역에 홀로 선 남자.  점점 거세지는 눈발, 그리고 천천히 시작되는 음악 ‘내 오랜 침묵은 깨어지고’. 해바라기의 노래였다. 그 무렵 저 멀리 기차가 눈발을 헤치며 역에 들어온다. 기다리던 여자는 보이지 않고, 남자는 고개를 떨군다. 음악의 호흡이 점점 다급해지고 기차는 빠르게 남자를 스쳐간다. 눈발이 미친 듯 흩날리고 체념한 남자는 돌아선다. 그런데 그 순간, 기차가 지나온 자리 저 먼 곳, 천천히 그에게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여자에게 다가가고 여자는 남자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카메라는 이제 하나가 된 둘의 뒷모습을 롱테이크로 잡는다. 그들이 걸어갈 먼 길을 상징하듯 작은 소실점이 될 때까지.

        

워낙 오래전이라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 머릿속에서 멋대로 각색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장면과 노래만큼은 깊이 각인됐다. 함박눈이 퍼붓던 시골 기차역과 그 뒤로 남겨진 적막함. 단지 그 이미지가 주는 서정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러브스토리로 위장된, 완성도 미완도 아닌 엉킨 실타래 같던 당시 나의 혼란한 상황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철부지 시절, 나 역시 눈을 무척이나 기다리던 때였던 것 같다. 또 다른 시작에 대한 희망처럼 말이다. 이제 올해도 12월이 시작됐다. 다시 눈을 기다려본다. 커다란 함박눈이면 좋겠다.


음악 듣기: 오랜 침묵은 깨어지고  https://youtu.be/CsDSmdWMNjI


<사진출처 미상: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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