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할머니
나의 할머니는 토끼를 키웠다. 애완용은 아니고 용돈벌이를 위해서였다.
설이나 추석 전날 삼촌들이 오시면 식용이 되기도 했다.
큰 할배인 증조부께서 말을 몰고 다니며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고 그것을 물려 받은 나의 조부께서는 돌아 가시기 직전까지 일부만 자식에게 증여하고 실질적 경제권을 쥐고 계시는 현명함을 발휘하셨다.
촌부자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래봤자 땅에서 나오는 돈의 위력이 크던 시기는 이미 지나 있었다. 그래도 큰 돈 쓸일이 없었던 할아버지, 할머니께는 적지 않은 연소득이 논을 부치는 사람들로부터 들어 왔고, 80년대 중반에
촌사랑방에 칼라 테레비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구두는 랜드로바였고 우산은 자동우산, 약탕기에는 늘 구기자 물이 끓고 있었다. 할머니의 외출용 한복과 안경, 가방도 부잣집 할머니 소리 듣기에는 충분했다.
그렇지만 경제권을 할아버지가 쥐고 있던터라 할머니가 운신의 폭을 넓히는 수단이 바로 토끼였던 것이다.
토끼 기르기의 장점은 사육 시작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먹이도 별도의 비용없이 주변에서 조달한다는 점이었다.할머니는 토끼를 토기장에서 키웠다. 초등학생 키만한 높이에 사과상자 크기의 생활공간을 네개의 나무 다리가 받치고 있었고 정면에는 석쇠처럼 생긴 철망으로 막고 먹이를 주거나 토끼를 꺼낼 수 있는 작은 출입구를 별도로 두었다.
토끼는 빼짱구라 불렀던 질경이, 민들레, 고들빼기 잎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풀은 고들빼기였다. 친구들과 동네 거랑에서 놀다가도 고들빼기가 보이면 뽑아서 한켠에 모아두었다가 놀이가 끝나면 큰집에 가서 토끼에게 주었다. 할머니는 주로 흔한 질경이를 작은 칼로 뿌리를 베고 토끼 먹이로 주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당시 토끼 한마리는 2~3만원 정도 했던 것 같다. 할머니의 용돈으로 유용히 쓰였을 것이다. 그 돈의 일부는 내 입으로도 들어 왔을테고. 토끼야 언제 커서 팔릴지도 모르고 경제권은 할아버지가 쥐고 계셨기에 형과 내가 큰집에 가면 용돈을 주로 주시는 건 할아버지셨다. 학교 끝나면 거의 매일 큰집에 갔는데 집으로 돌아갈 때면 형과 나에게 백원씩 주셨다. 할아버지가 잊고 안 주시는 날은 할머니 옆에 앉았다가
"아~들 돈이라도 한 닢씩 주소 와!" 하고 말씀해 주셨다.
당시는 거의 모든 과자가 백원이었다. 새우깡, 꿀꽈배기, 껌이 그랬고 하드는 백원, 쭈쭈바는 오십원이었다.
그 돈은 그렇게 푼돈답게 쓰였다. 지금 생각에 그 돈을 모았다가 세계문학전집이라도 사서 읽었으면 지금 내 모양이 조금 달라졌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명절 전날 토끼 중 한마리는 식용이 되었다. 삼촌들이 오시면 사랑방 옆 대청에서 화투를 쳤고 그 옆에는 항상 술상이 있었다. 술상 위에 오르는 것이 토끼찌개였다. 도축은 할머니가, 요리는 막내 삼촌이 맡았다. 망치였는지 돌이었는지 둔기로 토끼를 기절시키고 목덜미에 가죽을 칼로 조금 찢고 빨대로 바람을 불어 넣으면 가죽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가죽이 몸통과 분리하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때 잘 드는 칼로 가죽을 벗겨 내면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옷감에 가위질하듯 가죽이 쉽게 제거되었다. 토끼 고기는 지방이 적고 단백질이 많아 맛이 담백하고 식감은 질기기보다 딱딱했다. 고추장, 간장, 고추가루로 간하고 파, 마늘을 많이 넣으면 막내삼촌 표현대로 '빡빡한' 토끼찌개가 되었다.
1988년 여름방학 직전 나의 아버지는 경주에서 농사를 지으시다가 대전으로 이사를 결심하셨다. 할아버지는 조상이 물려준 토지 관리차원인지, 대학 등록금을 감당하기 힘들었지는지 명확치는 않지만 아들 다섯 중 큰아버지와 넷째인 나의 아버지를 농사짓게 하여 가까이 살게 하고 세 명의 삼촌은 대학까지 시켜 도시로 살림을 내주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논농사와 함께 소 다섯마리를 키우다가 우리 형제의 교육을 위한 결심으로 마흔까지만 농사를 짓고 셋째 삼촌의 처남에게 일자리를 부탁하여 대전으로 이사를 나오신 것이다.
5남1녀를 두신 할머니에게 모든 손주들이 귀하겠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큰집에 찾아와 인사드리고 밥도 먹고 심부름을 하는 우리 형제에 대한 정은 더 각별하셨다. 대전으로 이사한 후 할머니는 눈물로 보내는 날이 많았고 방학때 찾아뵈면 그 마음을 담배 속지에 편지로 써서 주시곤 했다.
'용아, 정아, 내사 너거 떠났뿌고 맨날 우는 날이 많다. 너그 할배는 저녁만 묵으면 불 껐뿌고, 내사 마 눈감고 가마 누버서 너그 생각한다'
방학이 되면 대전에서 경주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큰집에 가서 일주일씩 있다가 왔다. 당시에 대전에서 경주로 운행하는 고속버스는 코오롱고속으로 하루 네번 있었다. 갈때는 평사휴게소, 올때는 추풍령휴게소에서 쉬어 가고 고속버스 승무원도 있던 시절이었다. 방학때도 토끼는 있었다. 고들빼기도 뜯어다 주고 땅바닥에 붙어서 자라는 질경이도 베어다 주었다. 친구들도 만나고 미꾸라지 잡으러 갔다오고 큰아버지 농사일 조금 거들어 드리면 일주일이 금방이었다. 우시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은 쉬운 걸음이 될 수 없었다.집에와서 가방을 열고 짐을 정리하면 당시 대표 방학숙제였더 탐구생활이 원래 두께보다 두꺼워져 있었다. 책을 펼쳐보면 담배 은박지에 쓴 편지와 함께 만원짜리가 몇장씩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몰래 넣어 둔 토끼 판 돈이었다.
민들레 닮은 잎에 톱니모양이 있던 그 토끼풀이 고들빼기라는 것은 어른이 되고나서 알았다. 장모님이 차려주신 밥상에 올라온 고들빼기 김치를 먹어보고 나서였다. 씀바귀처럼 쓴 맛의 고들빼기는 장모님의 텃밭에 소복이 자라고 있었다.
'어 이거 토끼 풀인데?'
오늘 오이김치 꺼내자고 열어본 김치 냉장고에 들어앉아 있는 고들빼기를 보니, 대전 이사 나오고 3년만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난다. 고들빼기라는 이름을 계속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글 : 손정 (저서 : 글쓰기와 책쓰기 / 당신도 불통이다 / 활기찬 업무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