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통풍환자다. 왼쪽 엄지 발가락에는 이미 많은 요산이 쌓여 관절부위가 볼록 튀어 나온데다 살짝 굽어지기까지 했다. 바람만 스쳐도 아프다는 통풍은 관절에 쌓인 요산 결정이 급성 염증 반응을 일으켜 예고없이 극심한 통증을 일으킨다. 집에서 쉬는 날에 발작을 하거나 앉아서 일하는 날 발작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어딘가로 이동해야되는 날 발작하면 꼼짝없이 목발 신세를 져야한다. 그러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통증은 말끔히 사라진다. 통증 횟수가 평생 정도로만 찾아오고 통증 지속시간이 일주일 정도라면 좋아하는 술을 적당히 먹어도 될 듯하다.
그런데 병을 연구하는 의사나 연구원들이 그렇게 게으르지 않다. 아주 열심히 연구한다. 속속 새로운 사실을 밝혀 발표한다. 통풍은 신장이 요산을 잘 걸러주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러므로 통풍이 지속된다는 것은 신장이 자신의 한계를 넘는 요산을 걸러내기 위해 쉬지않고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신장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 통풍은 그저 통증만 견디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 결국 신장을 망가뜨리는 질병인 것이다. 이제 술을 끊어야 할 이유가 등장했다.
힘든 일을 끝낸 후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술은 한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만 신장을 위해 이제 헤어질 때가 왔다. 그런데 통풍에 해롭다는 술에 대한 좀 더 새로운 이야기가 들린다. 요산은 처음부터 음식에서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포함된 퓨린이라는 물질이 몸속으로 들어와 대사되는 과정에 요산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풍환자는 퓨린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섭취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등푸른생선, 탄산음료, 동물의 내장류다. 이제 고등어와 콜라, 곱창은 다 먹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술 중에 발효의 과정을 거친 술에 퓨린이 많다는 것이다. 맥주, 막걸리, 청주가 발효주다. 반면 증류주인 소주는 퓨린 함량이 0 이란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나는 이제 소주만 먹으면 된다. 치킨에도 소주, 파전에도 소주다.
이제 나의 주장은 정립되었다. 통풍은 많은 고통을 동반하고 종국에는 신장을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고쳐야 한다. 퓨린이 많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방법인데 발효주,고등어,탄산음료,내장류가 그것이다.
그런데 밤낮없이 연구하는 사람들이 연구자들의 일인 법.
통풍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가 자꾸만 발표된다. 이쯤에서 내 주장이 더 이상 수정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어째 불길하다. 아니나 다를까 퓨린이 들어 있지 않은 소주도 요산은 생성하지 않지만 이미 몸속에 생성된 요산 배출을 막는다는 것이다. 언제는 증류주는 괜찮다더니 이제는 또 모든 술이 안된다고 한다.
무슨 연구가 이리도 자주 바뀐단 말인가? 나는 결심했다. 뒤에 발표된 연구결과는 믿지 않기로 했다. 통풍에 있어서 술은 처음 내가 접한 이론대로 맥주와 막걸리, 청주만 해롭고 소주는 괜찮은 거다. 조금 봐줘서 덜 해로운 거다. 더군다나 요산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배출을 막는 것이므로 물을 많이 마셔서 이뇨작용을 늘리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소주는 먹어도 된다. 아니 먹을 거다.
확증편향
자신의 주장을 정립함에 있어 원래 믿던 가치에 부합하는 증거만 수집하고 그에 반하는 증거가 출현하면 애써 무시하는 것을 확증편향의 오류라고 한다. 내가 어떤 연예인을 아주 좋아 하는 이유는 언행이 반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데 어느날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반듯한 행동 때문이었으므로 이제는 그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 한 시간이 멀다하고 인터넷에 그 사건과 관련해 새로운 기사가 뜬다. 내가 만약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 기사를 클릭해보고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안 후 그 연예인을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클릭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를 좋아해야하는 이유, 좋은 소식만 접해야 한다. 나쁜 소식은 아예 안 볼 것이다. 내 주장에 반하는 증거는 보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확증편향이다.
앞서 언급한 통풍에 대한 대처 역시 확증편향이다. 술을 먹기 위해 믿는 증거만 수집하고 술을 먹지 말아야 할 증거는 애써 무시하는 것이다. 확증편향이 나쁜 이유는 잘못된 메시지를 형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에 빠진 사람과는 애초부터 대화가 되지 않는다. 토론에 의해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이다.
12angry men에서도 확증편향이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끝까지 유죄를 주장한 3번 배심원이 증인인 아래층 노인을 대하는 자세이다. 노인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소년의 집 바로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다. 그가 주장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사건 직후 계단을 통해 뛰어 내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봤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노인은 불편한 한쪽 다리를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어야 한다. 많은 배심원들은 그 짧은 시간에 다리가 불편한 노인이 일어나고 걷고 문을 여는 행위를 다 할 수 있었을까 의심한다. 여기서 3번 배심원은 노인이 주장하는 소요시간이 20초였으므로 충분했을거라 주장한다. 그가 주장하는 유죄에 대한 증거는 20초인 것이다. 그런데 토론과정에서 노인은 20초가 아닌 15초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15초라면 더 짧은 시간이다. 이쯤되면 3번 배심원이 확증편향이 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처음부터 노인의 증언을 믿었던 것은 걸어 가는 시간이 20초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면 충분히 소년을 봤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초였다고하니 아마도 노인이 소년을 보는데는 다소 시간이 짧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증언에 의심을 가질만하다”
라고 해야한다. 그런데 그는 이미 소년을 유죄로 단정지었다. 유죄를 뒷받침하는 증거만 계속해서 수집하려 든다. 따라서 15초는 증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5초 라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노인이 뭔들 정확하게 알고 있겠소? ”
소년이 유죄이기 위해서 노인에게는 20초라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어야 했다. 자신이 믿는 증거다. 3번 배심원은 20초라는 증거를 신봉해서 유죄를 더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노인의 이동시간은 15초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침대에서 일어나고 거실을 가로질러 걷고 현관문을 열고 소년을 봤다는 노인의 주장은 점점 신빙성이 떨어진다. 3번 배심원의 주장에 반하는 증거가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증거를 고려해 자신의 주장을 재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못한다. 이미 확증편향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20초는 정확한 증거였지만 15초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확증편향은 투사와 더불어 우리가 가장 많이 범하는 의사소통의 오류이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가 심하든 그렇지 않든 확증편향에 빠져 있다. 누군들 내 주장을 쉽게 바꾸고 싶겠는가? 전재산을 갖다 바치고도 지구 종말을 보지 못한 사람조차도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보다는 신이 엄청난 노력으로 종말을 막았다고 인지적 일관성을 이루어 버리지 않던가? 확증편향에 빠진 사람들과의 대화는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상대는 나를 벽으로 인지할 것이다. 나는 내 주장을 바꿀 용기가 있는가? 소통은 이러한 용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