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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 강사 작가 Mar 08. 2020

언제든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우산

우산 없이 비와 마주치는 일은 준비성만 탓하기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일기예보를 보고, 들고 나가야지 생각하고 있다가 잊어버린 경우, 일기에 무관심하여 우산없이 문을 나섰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지 않으면 의심 없이 직진하는 경우, 집을 나서면 습관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분명 아까 까지만 해도 비구름이 아니었음에도 집에서 멀어지고 나면 금새 하늘이 울먹하고 있는 경우, 정작 우산을 챙겨 오고서도 버스에 놓고 내리는 경우.  

   

이럴 때 집 근처에, 일터 근처에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우산이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데 미처 우산을 챙기지 않은 사람이 쓰고 다음 날 갖다 놓는. 책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바로 찾아 볼 수 있는 사전이 옆에 있듯이. 초등학생 딸이 사회 문제 풀다가 ‘자본주의는 뭐고 공산주는 뭐야’ 하고 물어 보면 담백하게 답해 줄 수 있는 아빠가 옆에 있는 것처럼.    


글을 쓰다가 딱 알맞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만능 단어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주제가 떠올랐지만 거기까지 끌고 갈 소재가 없어 자판만 부서질 듯 두드리고 지우길 반복하다가 주제만 쳐 넣으면 소재를 퍼즐처럼 맞춰 턱 뱉어 놓는 기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판기에 캔 음료를 채워 넣는 것을 본 적 있다. 동전만 넣으면 화수분처럼 나오는 캔도 누군가는 손수레에 싣고 가져와 넣어 둔 것이다.     

‘아빠, 냉장고에 우유가 없네’     

우유가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사놓지 않아서다.    


내 머릿속에 단어가 없는 이유는 읽지 않아서다. 생각하지 않아서다.

현상을 보고 주제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면 무엇이 옳은가, 삶이란 무엇인가 묻지 않아서다.     

글쓰기 퍼즐 기계는 삶에 대해 묻는 사람이 타인과 세상을 읽고 나온 대답을 스스로 채울 때만이 작동한다. 채우는 사람도 사용하는 사람도 나일 수밖에 없는 언제든 가져다 쓸 수 있는 우산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갖다 놓지 않으면 그곳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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