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반대하는 결혼-
나는 비교적 엄마의 말에 순응하며 효녀딸로서 잘 살아왔다.
고등학교 때 부터 생활비를 보태는 착한 딸이었다. 황금마우스로 기록된 MBC 김기덕 아나운서의
신입때 첫방송은 ‘우리는 여고생’이라는 생방송이었다. 그 프로에 3개월간 고정출연하였다. 매일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는것인데 매일 새로운 에피소드를 찾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생방송이었다. 재미있는 방송을 위해 방송국 앞에 있던 이딸리아노라는 식당에서 밥도 잘 사주셨던 기억이 있다. 당시 출연료가 적지 않아 우리 집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용돈을 받기보다 과외아르바이트로 오히려 엄마에게 용돈을 드렸다. 내가 엄마나이가 되어보니 남편 없이 아이들만 바라보면서 살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지고 있는 돈을 쪼개며 늘 마음 졸이며 살았을 엄마에게 나는 어쩌면 기대고 싶은 언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늘 든든한 엄마 편, 엄마말에 순종하던 순둥이가 유일하게 엄마 속을 썪인건 결혼문제였다.
그놈만 아니면 된다는 그 말이 꼭 그놈하고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다져졌다.
나는 제주도에서 나고자란 가난한 집의 11남매 중 막내아들과 결혼했다.
제주도는 여자들이 더 악착스럽고 야무진반면 남자들은 놀고먹는 놈들이 많다며 (우리 엄마표현) 반대했다. 또 평생 얼굴 뜯어먹고 살거냐며 잘생긴 얼굴조차 못마땅해 하셨다.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제주도 희귀 감귤류를 종류별로 나뭇잎까지 넣어 정성스레 보내면 “문디 지랄한다 그냥 잘 먹는 귤이나 많이 보내지 모냥낸다고 저게 뭐꼬?” 늘 이런 식이었다.
결혼을 앞두고도 엄마는 수시로 상처를 주었다.
언니는 결혼할 때 예물을 7세트를 받았는데 달랑 금쌍가락지 하나가 웬 말이냐며
함이 들어오는 날(사실함이랄 것도 없고 여행가방을 남편이 들고 오긴 했다)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셨다.
남편은 뻘쭘해했고 민망해진 나는 라면이라도 끓여주려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언니가 기겁을 하며 달려와 그나마 요리를 배달시켜 먹인 일이 있었다.
나는 결혼식만 끝나면 엄마와 연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결혼을 앞두고 너무 마음이 힘들었다.
쓸데없이 팔이 길어 기성복이 안 맞는다며 양복점으로 데려가면서도 얼마나 구박을 해대는지 …평소 입을 수 있는 양복으로 맞추라며 잔소리를 해서 검은 색도 남색도 아닌 평상복같은 양복을 맞춰 지금도 결혼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나는 교사가 된 후 매일 왕복 버스표만 갖고 다녔다. 매일 아침 정성스레 도시락과 간식거리를 싸주시는 엄마덕분이었다. 나의 월급은 버스표와 약간의 비상금을 제외하고는 엄마에게 다 드렸다.
그래서 수중에 돈이 없어 약간의 대출을 받을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우린 둘 다 가난하다는 걸 알고 하는 결혼이기에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시댁에도 이불이니 예단 같은 것을 굳이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다만 서운하니까 시어머님께만 금반지와 한복을 해드렸고 모든 것을 생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딸을 다 떠나보내고 서운해할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혼수품대신 엄마의 장롱, TV, 세탁기 등 가전 일체를 새것으로 다 교체해 드렸다.
대신 엄마가 쓰던 낡은 가전제품들은 우리 신혼집으로 옮겨졌다.
굳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이유는 결혼하면 다시는 엄마에게 무언가 큰 선물을 드리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살면서 한 가지씩 새로 장만 할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의 결혼은 남다르게 치러졌다
결혼해서 살아보니.....
만약 내 딸이 그런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면
나도 엄마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놈만 아니면 된다는 말로 꼭 그놈하고 결혼해서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투지를 불러 일으키는 일은 없을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