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나의 교단 이야기(4)
# 낫들고 나타난 학부모
한창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복도에서 술 취한 학부형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맨 처음에는 나를 찾는 줄 몰랐었다.
“네가 뭔데 우리 딸을 어디 가라 마라야? 엉? 너 한번 나한테 죽어볼래?”
듣기만 해도 무서운 말들을 내뱉으며 몸이 휘청거릴 때마다 손에 든 낫이 위험해 보였다.
교감선생님의 제지로 간신히 진정을 하고 교무실에 마주 앉았다.
알고 보니 3학년에서 전교 1~2등을 다투는 K의 아버지였다.
어느 날 K는 나에게 상담을 요청해 왔다. (우리 반 아이와 사촌지간이었다.)
우리 반 OO이가 수원지역 인문계고등학교로 원서를 쓴 걸 알고 자기도 인문계로 진학하고 싶은데 부모의 반대가 심해서 고민이라고 했다.
부모는 수원에 가면 하숙비며 돈이 많이 드니 우리 학교와 한울타리에 있는 OO상고로 진학하여 장학금을 받으라고 했단다.
나는 지금 성적이 좋다고 해서 상고에서도 성적이 좋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주었다.
왜냐하면 상고는 주산 부기 타자등을 배울 때였는데 지금 중학교 공부와 연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작년에 전교 1등 한 선배 OO이도 상고로 진학하여 전교 1등은커녕 반에서 10등 안에도 못 들어 장학금도 못 받아 좌절한 예를 들어주었다.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부모님을 설득해서 우리 반 OO 이와 함께 수원에서 생활하면 생활비도 절약할 수 있어서 서로 좋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날 이후 술 먹고 학교를 찾아와 행패를 부린 것이 온 동네에 소문이 퍼져서인지 출퇴근 길에 마주치는 아버님이 많이 소심해졌다.
어쩌면 형편이 넉넉한 사촌집과 비교되어 아이가 상처받는 게 싫어 극구 수원행을 반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이의 간절한 희망대로 인문계고로 진학하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수원 인문계로 진학한 후 약사가운을 입은 자기 모습으로 그려본다고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빨리 독립하고 싶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며 스승의 날 선물을 보내왔다.
나를 만나 자신의 미래가 달라졌다며....
하마터면 낫으로 맞을 뻔했지만 나의 관심의 말 한마디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큰 보람을 느꼈다
# 교사가 되고 울 일이 많아졌어요
나는 시험 때마다 선생님들이 무지 부러웠다. 시험문제를 내고 우리들을 바라보는 선생님 마음은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질문이 많았던 나는 시험문제를 잘 찍는 편이었다.
늘 내가 선생님이라면?이라는 생각으로 시험범위를 공부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시험에 나올만한 문제를 짚어달라고 할 정도였고 실제로 내가 찍어준 문제가 나올 때가 많았다.
막상 첫 시험문제 출제 때 선생님이 되었다는 설렘보다 교무실에서 펑펑 울어서 선생님들의 놀림을 받는 수모를 당했다.
내가 맡은 과목은 8과목이었다. 학년마다 한 반씩 중1~고3까지 6반에 중2, 중3은 가사문제까지 출제해야 해서 과목수로 8과목이었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치다 수정할 수도 없는 철필로 긁어서 문제를 출제하던 시절이었다. 소위 말하는 ‘가리방’인데 강철판 위에 철필로 글씨를 써서 등사를 하는 방식이었다. 해본 사람은 누구보다 공감하겠지만 글씨가 생각만큼 잘 써지지도 않고 한 글자라도 틀리면 다시 써야만 했다. 게다가 그림이라도 넣으려고 하면 정말 엄청나게 힘든 작업이었다.
국어나 영어 선생님 같은 경우 많아야 3개 학년 문제를 내야 한다면 나는 8개 과목인데 주어진 시간이 똑같으니 눈물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서 해올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원래 내 수업시간은 32시간이다. 교감 선생님이 그건 너무 말이 안 된다며 그나마 6시간을 영어선생님께 상치교과로 맡겨주셨다. 하지만 가정수업은 여자면 누구나 가르칠 수 있다는 편견 때문에 억지로 맡은 영어 선생님은 수시로 어려움을 호소해 와서 내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나는 몸을 사리지 않고 수업을 도와주곤 하느라 집에 갈 땐 늘 목이 쉬거나 잠길 정도였다.
그러니 학교에서도 문제를 낼 시간이 빠듯했다. 결국 나는 너무 많은 일에 치여 눈물을 터뜨렸다. 교감 선생님은 철없는 신입교사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지셔서 나만 시험문제 출제를 일주일 연장해 주었다.
지금.... 그때처럼 하라고 하면 절대 못했을 것 같다.
# 등교시간에 없던 집이 한 채 생겼어요
학교의 사정상 1학년 수학교과를 상치과목으로 맡게 된 해가 있었다.
덕분에 처음으로 남학생반 담임을 맡게 되었다.
우리 반에는 특별한 아이가 있었다.
S는 태어날 때 머리가 너무 커서 출산이 어렵자 산부인과에서 양쪽 머리를 기구로 찝어서 간신히 출산을 했다고 한다.
뱃속에 있을 때는 극히 정상이었는데 출산을 하면서 뇌성마비를 갖게 되었다는 슬픈 사연이다.
사지가 뒤틀려,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걸음걸이에, 말이 어눌한 아이가 부담스럽지 않게 참고 잘 들어주어야 했다. 느린 걸음을 위해 화장실 하고 가장 가까운 위치의 교실이 배정되었다. 학교에서는 많은 배려를 해주는 편이었지만 그 부모님들은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었다.
하루는 출근길에 학교 울타리옆 공터를 포클레인이 밀고 다지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땅을 사서 밭은 일구려나 생각했다. 그런데 퇴근길에 보니 못 보던 집이 떡하니 서 있었다.
나의 퇴근길을 기다리던 S엄마가 반갑게 뛰어나오더니 집들이 떡이라도 먹고 가라고 하셨다.
불편한 몸의 S를 위해 땅을 사고 이동식 집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말만 들었지 이동식 조립주택은 처음보아서 너무 신기했다. 그 후로 S옆에는 못 보던 벨이 하나 부착되었다.
아이가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으면 부모에게 연락이 가는 시스템이었다.
소풍 때는 몸이 불편하여 참석 못할까 하는 우려와는 달리 제일 먼저 덩치 큰 S를 업고 오셨다.
심지어는 그늘에 선생님들 식사자리까지 맡아놓는 열성을 보이셨다.
2학년 수학여행 때도 속리산 문장대 꼭대기까지 아들을 업고 가신 정말 대단한 엄마였다.
가끔씩 만약 내가 S엄마라면 나도 저렇게 아이를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생각한 적이 많다.
비록 몸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부모의 사랑에 힘입어서인지 매일매일 희망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의 사랑은 정말 위대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 종에 맞아서 종철이라고요?
"야 타!" 햇살을 받으며 늘 웃는 표정을 하여 어떤 마음인지 잘 알 수 없는 A가 자전거를 내 앞에 대며 한 말이다. 나는 아이가 무안하지 않게 웃으며 뒤에 타고 아이들이 코스모스 꽃길 가꾸기 봉사하는 길을 왔다 갔다 하며 지도를 했다.
남학생반을 한번 맡았더니 그다음 해에도 남학생반이 맡겨졌다.
A는 4살쯤 되었을 때 엄마 따라 절에 갔다가 스님이 치는 종 속에 머리를 박고 놀다가 종을 맞고 그 후로 뇌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4살 정도의 지능에 멈춘 듯했다. 가끔 교실에다 오줌을 싸기도 했다. (특별히 무서운 선생님 시간에는 100% 교실이 흥건했다)그래서 우리 반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은 냄새에 수업이 힘들다고 호소하기 일쑤였다.
이상하게 표정은 늘 웃는 것 같은 묘한 표정으로 수업시간에 잘 앉아 있었다.
나는 매일 A가 한 가지라도 배워서 공부는 못하더라도 자기 밥그릇은 잘 챙기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할아버지가 우리 학교 초대 교장 선생님이셔서 교장 선생님들도 관심 있게 가끔씩 아이의 상태에 대해 물어보곤 하셨다.
하루는 아이들 눈에 좀 모질라 보이는 A의 화려한 도시락 반찬을 보고 우리 반에서 힘이 세기로 모두 인정하는 OO이가 S의 반찬을 뺏어먹으려다 포크로 손등을 찍힌 일이 있었다. 먹을 것은 절대 아이들에게 뺏기지 않았다.
A는 시험지에 거의 대부분 쵸카파 , 타파츄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글을 써놓는 아이였다. 객관식에도 카, 파, 쵸, 치 이런 식으로 한 글자씩 쓰니 그 어렵다는 0점을 자주 맞았다. 나는 답안지 쓰는 요령이라도 알려주면 몇 개라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종례 후에 교실에 남겨 답안지모형을 가지고 객관식은 1번에 빗금 치는 방법을 여러 번 알려주었다.(한 번호만 쭉 칠하다 보면 몇 개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루는 국어 선생님이 전교에서 우리 반 한 명이 국어 100점을 맞았다고 칭찬해 주셨다.
나는 너무 좋아서 누구냐고 했더니 A라고 했다. 당시는 OMR 카드가 아니어서 선생님들이 채점을 편하게 하기 위해 빗금 쳐야 할 부분에 구멍을 내서 위에 대보는 식으로 채점을 했다. A는 나의 지도를 받고 너무 재미있었는지 1,2,3,4, 번 모두 빗금을 친 것이었다. 전체에 다 칠한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선생님은 정답에 구멍을 내어 맞추어보고 100점이라고 한 어이없는 일이 생겼다. 그 일 이후에 한 칸에 한 곳에만 칠하라고 가르쳐 줬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글이라도 가르쳐주고 싶어서 매일 10분씩 한 글자씩 가르쳐 줬었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웃는 얼굴로 뭘 계속 쓰고 있길래 봤더니 삐뚤 빼둘한 글씨로 연습장 전체에 내 이름을 쓰고 있었다.
나는 순간 이 아이의 생각 속에 내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 감격의 눈물이 나왔다.
그래 이맛에 하는거지 …나는 교사가 되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