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는 말

-선생님! 울지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by 집공부

지금은 입시제도가 달라졌지만 1989년 내가 안양 서여중에 근무했을 때 만해도

안양지역은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당시에는 과학고 외에는 외고나 자사고 같은 특목고가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학기에 한 번 시행하는 전국 학력고사 성적이 공개되어 학교 간 성적 비교가 가능하기도 했다.

그 당시 최고의 성적이 나오는 안양고나(한 학급에서 서울대를 28명이상 입학시키던 시절) 공주사대부고가 전국에서 명문 고등학교로 손꼽힐 때였다.

그러다 보니 안양에 있는 학교들은 안양고에 몇 명을 입학시켰느냐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의 개별 상담을 통해 자신이 가고 싶은 고등학교를 정했다.

당시 고등학교는 원서를 내고 그 학교에 떨어지면 야간 학교 외에는 갈 만한 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신중하게 상담하고 예년의 합격선을 분석하여 합격 여부를 판단하고 심지어는 원서를 두 개를 써서

마감 시간에 경쟁률을 보고 학교를 정하기도 할 정도였다.

지금의 대학 입시지도 못지않게 더 치열한 전쟁 같은 입시를 치를 때였다.

(이런 아이들의 극심한 경쟁을 우려하여 지금은 대부분 지역이 평준화되었다)


나는 아이들과 현재의 성적을 놓고 상담하지 않았다.

실업계를 희망하는 아이들은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으므로 먼저 상담을 마쳤다.

인문계를 희망하는 아이들에게는 "네 성적으로는 어느 학교를 갈 수 있다”라고 성적에 맞추어 상담하지 않고 자신이 꼭 가고 싶은 학교를 적어내게 했다.

그리고 다시 개별 상담을 통해 그 학교를 가기 위해 자신이 어떤 점을 더 노력해야 하고 어느 정도 점수를 올려야 할지를 생각해보고 적어내게 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아이가 현재 자신의 성적보다 훨씬 상향해서 학교를 지원하게 된 셈이다.

나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담과 원서 작성을 그 당시 학년 부장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상향지원으로 인해 불합격 행렬이 이어진다면 학교로서 곤혹스러울 게 뻔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무모한 도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젊은 나이라 그런지 무식했고 용감했다.

내 생각에는 아이들이 절실하게 목표를 두고 공부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목표가 분명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의지와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무조건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상담이 전체적으로 다 마무리된 후에 아이들에게 자신의 목표 학교를 다른 친구들도 알 수 있도록 같은 학교를 희망하는 아이들끼리 모아 자리를 배치해 주었다.

잔인하게 말하면 보이는 경쟁자가 수업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어떤 공부를 하는지 서로 파악하고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긴장된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좋게 말하면 성적이 비슷한 아이들끼리 다 같이 합격하기 위해 팀으로 협력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해 주었다. 수업을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절로 힘이 난다고들 하셨다. 계속되는 선생님들의 칭찬에 아이들도 점점 힘을 내기 시작했다.


두 달 후 합격자 발표가 이어지자 학교에는 희비가 교차하기 시작했다.

나의 무모한 도전을 잔뜩 못마땅하게 생각한 학년 부장은 불합격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마치 우리 반 아이들일 거라는 확신을 가진 듯 나를 힐끔 쳐다보시곤 했다.

학년 부장의 우려와는 달리 안양고만 남기고 모든 학교 발표가 다 끝날 때까지 우리 반은 100% 합격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쓰고 있었다.

아이들 모두 자신의 성적보다 훨씬 상향으로 지원한 학교에 합격하다 보니 기쁨이 배가 되었고

자신들도 마음만 먹고 공부하면 된다는 확신으로 더욱 기뻐했다.

하지만 옆 반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에 크게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없는 묘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날 드디어 전국에서 명문으로 꼽히던 안양고등학교 발표 날이었다.

원래 기존의 성적을 반영하여 지원했다면 우리 학교에서는 2명 정도밖에 지원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학년 부장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우리 반 지원이의 원서를 들고 결재를 받으러 갔을 때

학년 부장은 대놓고 화를 냈다.

“학교 말아먹을 일 있어요? 난 도저히 결재를 못 하겠으니 알아서 해요”

나는 지원이의 지난 학력고사 성적으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지 말고 지금의 성장 속도와 가능성으로 지원하게 된 점을 강조했지만 들으려 하지 않으셨다.


물론 나도 합격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서 도전해보는 그것조차 안 된다고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께서 나의 유별남을 믿고 이해해 주셔서 원서를 무사히 접수는 할 수 있었지만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기에 피를 말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매일 새벽마다 지원이를 위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선생님 저 시험 잘 봤어요.”라는 자신감 넘치는 지원이의 말에 원래 시험 잘봤다는 아이들이 떨어지는 것을 많이 봐온 터라 발표 때까지 마음을 졸일 수밖에 있었다.

오후가 되자 안양고에서 어떤 소식을 전해올지 교무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화벨 소리에 교감 선생님이 심호흡하고 수화기를 드셨다.

교무실은 일시 정지상태가 되어버렸다.

“네? 아 네 ...한 명이 떨어졌다고요…….”

그때 교무실에 있는 모든 선생님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네 이름이 OOO라고요.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감 선생님의 대화를 엿듣던 선생님들은 우리 반 지원이가 아니라 전교 1~2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아이가

불합격했다는 소식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우리 반은 전원 100% 희망학교 합격이라는 대성공을 거둬냈지만

갑자기 내 옆에 앉아있던 OOO의 담임 선생님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바람에 기쁨은 사라지고 오히려 괜히 예상치 않게 원서를 써서 밀어낸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서 가시방석 같았다.

교무실에 오가던 아이들의 입을 통해 불합격 소식을 들었는지 OOO이가 담임 선생님께 찾아왔다.

“선생님 왜 우세요? 저는 괜찮아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실은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래서 저는 후회하거나 불합격이 부끄럽지 않아요. 다만 대한민국에 저보다 그렇게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 노력해 볼게요.

저 야간 학교에 가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꼭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담담하게 오히려 선생님을 위로하는 그 아이가 왠지 커 보였다.

한 번도 수업에서 제자로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내가 만난 최고로 멋진 제자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자신이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아이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며칠 후 다행히도 미등록자가 한 명 생겨서 그 아이가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은 의사가 되어 oo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어 더욱 기뻤다.


우리는 가끔 아이들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할 때가 많다.

아이들에게 꿈을 갖고 노력하면 된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결과에 너무 매달려 중간에 노력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간과할 때가 많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패를 맛볼 수도 있지만, 실패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도 중요한 배움의 포인트가 된다.


나는 아직도 자신의 불합격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자신을 자책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가 없다는 멋진 말을 할수 있을 만큼 나에게 주어진 모든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나?

오늘도 질문해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족과 함께하는 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