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인 듯 아닌 듯 계속 조그맣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일어나 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수화기 너머 다급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저 OO인데요 저희 아빠가.... 아빠가 새벽에 돌아가셔서 저 오늘 학교 못 가요”
순간 잠이 확 깨 버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어머.... 그래 알겠어 일단 걱정하지 말고 선생님이 어디로 가면 되니?”
아이는 안양 중앙병원영안실이라고 했다.
담임을 맡아 2주도 지나지 않은 3월 중순의 일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빠라는 울타리가 없어졌을 때의 불안함을 잘 알고 있었다.
oo이의 부모님은 24시간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계셨다. 꽃샘추위에 새벽 한기가 더 컸던지 석유난로가 켜진 상태에서 안고 옮기다 몸에 불이 붙는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사람마다 죽음을 맞이하는 때가 정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전화기 너머 전해지는 아이의 황망하고 슬픈 목소리가 더 마음이 쓰였다.
아침 조회 시간에 아이들에게 OO 아빠의 사망소식을 알렸다.
아직 같은 반이 되어 친해질 시간이 부족해서 몇 명이나 조문을 갈지 잘 몰랐다.
아이들에게 이럴 때 말로도 위로가 되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조금이라도 내어주어 슬픈 마음을 함께 한다는 표현으로 조의금을 내줄 것을 당부했다.
오후에 반장이 돈봉투를 가져왔다. 아이들이 각자 용돈을 조금씩 냈는데도 제법 큰 액수였다.
누가 얼마를 냈는지 알 수도 없는데도 자신이 아끼는 용돈을 선뜻 내놓았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특했다.
대신 1000원짜리가 많아 은행에서 바꿔다 놓은 신권 만원으로 다 바꿔 넣어주었다. 그런데 이름은 없어서 누군지는 잘 모르겠는데 봉투 안에 자신의 한 달 용돈을 다 넣은 듯 5만 원을 낸 아이가 있었다.
나는 누군지 너무 궁금했다.
이렇게 아이들과 내 봉투를 준비해서 방과 후에 조문을 가기로 했다.
나는 아직 아이들이 친해지지 못해서 일단 우리 반 대표니까 반장, 부반장과 가기로 했다.
그리고 꼭 함께 가고 싶은 친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운전을 못했다.
남편이 운전하고 내가 조수석에 앉으면 3명만 데리고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아이들이 더 많다면 택시를 불러 내가 우리 차에 타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출발하려는데 딱 2명이 중학교 때부터 친구라며 꼭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순간 가까운 거리고 아이들이라 뒤에 4명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냥 택시를 하나 부를까? 짧은 시간 고민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우리 반 반장이 차에서 내리면서
“그럼 네가 갈래? 내가 양보할게”라며 아이를 차속으로 밀어 넣고 얼른 내리더니 그냥 가 버렸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 앞이라 별말은 안 했지만 나는 속으로 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학급을 위해 최선의 봉사를 하겠다고 하여 반장으로 뽑힌 우리 반 1등이었다.
3월 초 환경 미화를 위해 아이들이 늦게까지 남아서 아이디어도 내고 모두 열심히 환경을 꾸밀 때도 그 아이는 교회에 꼭 가야 하는 날이다, 엄마가 아프셔서 집에 가야 한다는 등 온갖 핑계를 대고 한 번도 남아서 일을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학원도 가고 숙제도 산더미지만 임원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남아서 열심히 환경구성을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들이 너무 예쁘고 고마웠다.
나는 며칠간 관찰결과 반장인 그 아이가 하는 행동이 하나하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었다.
자기가 우리 반을 대표해서 문상을 가는 자리건만...
차라리 솔직하게 중요한 학원수업이 있어서 참석이 곤란하다 말했으면 지금처럼 더 얄미워 보이진 않았을 것 같았다.
아이들을 지켜보다 보면 공부는 잘하지만 인성이 별로인 애들이 있다.
그런 경우 성적이 중요한 학교생활에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주변에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
살아보니 ….
결국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협업이 가능하고 성장도 할수 있다.
하루 학원을 빠져서 성적이 떨어질까 조바심을 낼 정도라면 언제라도 성적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그 아이는 내가 만난 최악의 반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