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무의미 속의 의미

by 글마루

어젠 아침 8시 30분까지 오랜만에 늦도록 잠을 잤다. 연 며칠 내리는 장맛비에 어디 나서기도 주저되고 나설 때도 없으니 뭔가를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한동안 열심이던 글쓰기도 손 놓은 지 얼마인지. 머릿속에서는 쉬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만 나를 잡아끌 뿐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는 나날이 이어졌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업무상 '소진(burn out)'이라고 할 수 있다.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잘 마시지도 않는 맥주 한 캔을 따서 저녁식사 전에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퇴근만 하면 일과처럼 보던 '미드'를 시청했다.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무기력감이 나를 잠식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했지만 그냥 마음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다. 휴일이니 어쩌면 휴식을 취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는데 그동안 나는 지나치게 하루를 알차게 살려고 했었다. 뭔가를 꼭 해야만 마음이 놓이는 강박에 가까운 삶에서의 '의미 찾기'를 습관적으로 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감과 위기의식. 내가 가장 편안해야 하건만 조금이라도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아깝게 여길 정도의 바쁜 날들을 보내다 보니 그런 강박의식이 내 내면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든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도서관에도 가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빌린 책은 몇 페이지만 읽다가 만 채로 보냈다.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라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찾아왔지만 모른 척했다. 휴대폰을 바꾸면서 요금제 때문에 가입한 유료채널 '넷플릭스'에 뒤늦게 가입하고 영화나 시리즈를 찾아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실로 오랜만에 평범하고도 무의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때마침 이제 글 쓸 소재도 거의 고갈이 되고 글 쓰는 실력은 별로 늘지도 않은 채 제자리걸음에 낭패감이 몰려올 때였다. 누군가는 글 쓸 주제가 없더라도 습관적으로 써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전문작가가 아니기에 굳이 그런 고통(?)을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 밑천이 바닥난 내 글쓰기 실력은 가뭄에 메말라 가운데만 겨우 물이 고인 저수지가 연상되었다. 그렇게 나는 도망자 아닌 도피자가 되었다. 글쓰기라는 내가 설정한 '굴레'에서.


다큐나 영화 아니면 드라마는 좀처럼 보지 않던 내게 '미드'는 영화처럼 호기로웠다. 그린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잉글랜드를 넘어 콘스탄티노플까지 바이킹족의 생존사를 보여주는 '바이킹'의 이야기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바이킹=약탈'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만큼 그들 민족은 '약탈'의 대명사로 인식할 정도로 다른 한편으로는 '야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주 무기가 도끼인 그들이 벌이는 전쟁을 보며 처음에는 그 살벌하고 잔인함에 탄식을 했지만 그들의 삶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살기 위한 방편으로 공격하고 공격받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나답지 않게 어떤 목표도 설정하지 않고 일터에서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간단히 집안일을 한 후 바로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역사적인 토대 위에서 설정된 드라마인지 검색하지도 않고 이야기가 흐르는 대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늘 그렇듯 주인공들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선한 조력자가 허무하거나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주인공 곁에는 이제 친한 사람이 모두 죽어가고 혼자 위기를 헤쳐나가야 한다. 그는 상실감도 느낄 겨를도 없이 자기 앞에 다가온 위기(죽음)를 기지와 힘으로 헤쳐나가고 사랑하는 사람과 재회하지만 바로 결합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가로막힌 현실이라는 벽에서 바로 결합하지 못하고 또다시 이별을 해야 하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앞날을 기약하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난다.


한 달을 책도 보지 않고 글도 거의 쓰지 않으면서 보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없을 만큼 일과 학업을 숨 가쁘게 병행하다가 이젠 더 이상 '도전'할 용기도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어떤 철학자는 중년에는 자신의 성격에서 에너지를 죄다 쥐어짜 낸 듯 문화 화한 인간으로서의 열정이 차갑게 식어버린다(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로버트 존슨, 제리 룰, 90쪽)고 한다. '살지 못한 삶'에 대한 허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데 대한 위기의식, 무엇보다 '열정'이 식는다는 것이다. 어느덧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도 그 '열정'이 달아나버린 걸까?


금같이 아까운 시간을 너무 무의미하게 일차원적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껏 살아온 나를 돌아보면 나는 보통의 주부들이 누렸던 평범한 일상을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나 허전함이 나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삶에 의미라는 게 꼭 거창해야만 제대로 된 삶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내 마음 가는 대로, 내키는 대로 살아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본다면 이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본다.


어제 종일을 먹고, 쉬고, 영화 보면서 꼬박 보낸 후 오늘은 모처럼 도서관에 왔다. 책을 얼마를 읽기보다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갈 곳은 '도서관'이라는 것이다. 아는 이 없고, 반겨주는 이 없지만 이 공간에 있으면 가장 편안하고 충분한 이 감정. 이 또한 어제 빈 공간에서 머물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하루도 무의미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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