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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복이란

행복이란

2. 처음받은 생일 상

by 글마루

문자가 한 통 왔다. ‘수업 마치고 우리 집으로 와. 같이 점심 먹자.’ 유일하게 주 1회 쉬는 휴무 날, 나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친구 집으로 향했다. 중.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한 번도 가까이해본 적이 없던 친구였다. 우연히 친구들과의 산행으로 동행을 하게 된 후로는 이따금 식사 몇 번 한 것이 다였다. 점심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평소에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기에 집으로의 방문은 처음이었다. 집 안은 정리 정돈이 잘 되어서 깔끔했다. 식탁에는 이미 밥상이 다 차려져 있었다. 그녀는 배고프겠다며 식탁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여러 밑반찬에 불고기까지 게다가 미역국은 전복을 넣어 끓인 것이었다. 전날이 내 생일이라고 밥 먹자고 하더니 생일상을 준비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이런 진수성찬은 처음 받아본다고. 숟가락을 집어 국물을 떠먹었다. 진한 국물 맛이 우러났다. 그러면서 한편 서글퍼지고, 또 한편 울컥해졌다.


그녀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쉰이 가까워지도록 누가 해준 생일상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친정에서는 생일이 언제인지도 잘 모르고 지나갔다. 우리 자매들은 어른이 되어서야 생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남들이 생일이라고 서로 축하해주고 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결혼해서도 내가 며느리다 보니 생일을 챙길 기회가 없었다. 시댁에서는 생일 같은 것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갈 정도로 무심했다. 서럽기도 하면서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억울하면 내가 내 생일 챙기면 그만이지 여겼다. 그렇지만 자기가 자기 생일상을 차리는 것이 쉽지 않다. 잘해야 미역국 끓이는 정도이다.


내가 쌈을 좋아한다고 쌈도 여러 가지로 차려져 있었다. 적겨자, 케일, 치커리, 쌈배추에 상추까지 배가 두둑하도록 달게 먹었다. 누가 차려준 밥상을 받는다는 것은 눈물겹도록 뿌듯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준비해줬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앞에 앉아있는 그녀가 커다란 산처럼 든든했다. 친정엄마나 언니에게서 받지 못했던 따뜻함과 보살핌을 받아서인지 친구가 친정엄마 같기도 하고 언니 같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친구에게 말했다. 친정 온 기분 같다고. 네가 꼭 친정엄마 같다고. 그런 내 말에 그녀는 친구인데 당연하다고 덤덤히 말했다.


식사가 끝나고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나는 자존심 상할 수 있는 얘기지만 말했다. 난생처음으로 생일 밥상을 받아본다고.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 동정받고 싶어서도 아니었고, 혹시 무시당할까 봐 염려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 솔직한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런 말이 스스럼없이 나온 것은 그녀와 가까이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속 깊고 너그러워 보이는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간에 힘들었던 과거를 푸념 섞어 이야기했고, 그녀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따금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여줄 뿐이었다.


봄기운이 완연하지는 않아도 그녀가 사는 아파트 뒷산으로 산보를 갔다. 올라가는 언덕길에는 벌써 복숭아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바람이 아직은 차가웠지만 내리쬐는 햇빛 덕분에 산책길이 훈훈했다. 콧속으로 시원한 공기가 들어왔다. 하늘은 옅은 구름 떼가 간간이 떠다녔다. 산 입구에는 공간만 있으면 누군가가 일궈놓은 손바닥만 한 텃밭이 옹기종기 정겨웠다. 산을 오르면서 이름 모를 들꽃과 눈을 맞췄다. 저마다 앞다퉈 줄기를 밀어 올리는 새싹들을 보니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다. 분위기에 취해 그녀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때, 여중생 둘이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 2017년 월간 <좋은생각>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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