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봄비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온 세상을 고요 속에 파묻을 것 같은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작년 봄이 엊그제 같건만 금세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침에 손수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소박한 점심을 먹는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찬이지만 봄비를 반찬 삼아 먹는 밥이 달다. 비가 와서 매일 하던 산책은 글러 버렸다. 휴대폰에 저장된 노래를 틀고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잠시 걷는 길은 매일 걸어도 질리지 않았다. 노래 가사를 들으며 주인공이 되어 사랑하고 이별하는 상상을 하다 보면 점심시간은 금방 끝난다.
평소에 기름진 음식을 즐겨 하지 않는 내가 오늘은 비가 와서인지 웬일로 기름지고 고소한 음식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특히 예전에 가끔 사 먹던 비빔만두가 간절하다. 식용유 냄새 느끼하게 풍기며 노릇노릇 구워진 납작만두를 초고추장 넣은 채소에 버무린 것에 싸 먹고 싶다. 영화 속에서만 일어날 법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해 비빔만두를 사다 준다면 그를 영원히 좋아할 것만 같다. 빈 배 속을 채우고 나니 기름진 것을 먹고 싶다는 간절함이 좀 옅어지기는 했다.
비는 소리 없이 언 땅을 다독이며 계속 내리고 있다. 문득 한 편의 시가 떠오르며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시인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시적 화자는 ‘눈은 계속 내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벌써 내 속에 와 고조곤히 이야기 한다’고 했다. 시적 화자는 가난한 자신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고 했는데 눈이 내리니 아름다운 나타샤가 더 그리웠던 게 아닐까. 실제 나타샤에 대해 ‘김자야’로 보는 이와 짝사랑한 ‘난’이라는 여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누군들 어떠리. 시를 읽는 이의 마음속에 나타샤는 각자가 다를 것 아닌가. 대상보다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고 그리움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다섯 평도 안 되는 자그마한 사무실에서 홀로 쓸쓸히 믹스커피를 마신다. 비가 오니 고요한 운치가 있지만 한편 서글프고 쓸쓸함이 습기처럼 젖어온다. 커피를 마시며 나도 그리운 이를 떠올려 본다. 잠시 전 파주에 사는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젯밤 꿈에 우리 친구들 셋이 어디를 가더라는 것이다. 가는 곳이 어디이든 그리운 마음이 꿈으로 투영되어 나타난 것은 아닐까. 수십 년 쌓인 그리움을 봄비에 살랑살랑 녹여본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는 온갖 그리움을 구름떼처럼 몰아온다.
초. 중. 고를 함께 다니던 시골 소녀들. 세월의 빠름을 야속하다고 탓해야 하나. 우린 벌써 쉰을 바라보고 있다. 하나는 파주에 나는 구미에 또 하나는 부산에 산다. 부산에 있는 친구와는 최근에야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보지만, 파주에 있는 친구는 결혼 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놀러 오라고 하지만 부산에서 파주까지 가는 데만 종일 걸린다. 삶이라는 핑계의 무덤에 파묻혀 우린 선뜻 발걸음을 내뻗지 못한다. 우리는 쉬이 만날 수 없기에 더 그리운지 모른다. 우리는 아직도 풋풋한 여고생의 모습인 채다.
어느 날 예전 사진들을 뒤적이다 찾은 몇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늦가을, 금빛 물결 찰랑이는 속에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오던 때였다. 세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또 다른 친구와 누렇게 찰랑거리는 벼 이삭에 살짝이 들어앉아서 세상 천진한 미소를 피우고 있었다. 그 후에도 사진을 수도 없이 더 찍었겠지만 삼십 년도 더 된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 걸 보면 어떤 조건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함을 머금어서일 것이다. 그 순간만큼 들뜨고 설렌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길가에 핀 코스모스만 봐도 달뜨던 시절.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코스모스만 봐도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노란 벼 이삭을 봐도 거기에 친구들의 얼굴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움을 탑처럼 쌓으며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세상살이가 팍팍해 연락 두절이던 친구가 이제 살만해졌다며 소식을 전해온다. 보고 싶은 마음처럼 만남이 그리 쉽지 않다. 각자의 생활이 있고 일터에 얽매이다 보면 짬을 내기가 쉽잖다. 오늘만 살고 말 것이 아니기에 일이 우선순위가 되었다. 우정과 인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다 때려치우고 친구를 만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만날 때는 커다란 의미이겠으나 선뜻 실행하지 못한다. 영화에서처럼 어느 한 가지를 위해서 다 던지고 우리의 감성을 충족시킬 행동을 선뜻 취하지 못한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대지를 넉넉하게 적시는 봄비가 사부작사부작 내린다. 봄이라는 놈이 저만치서 스멀스멀 손짓하며 다가오는 것 같다. 묘한 그리움을 부르며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얼마 안 있으면 연둣빛 새싹들이 기지개를 켤 것이다.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언덕 너머에는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물결치는 나른한 오후를 맞이하겠지. 봄은 비를 몰아오고, 바람결에 소식을 물어다 주고, 가슴에 그리움의 작은 씨앗 하나 심어준다.
-2016년 4월 즈음 구미보 인증센터 근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