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똥칠거지*였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기억나는 장면. 세 살 무렵, 연년생이던 여동생을 안고 젖을 먹이던 엄마의 등에 나는 거머리처럼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그땐 엄마의 냄새가 너무 좋았다. 세 살배기도 아기니까 어쩌면 그러는 것이 당연했다.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엄마는 내가 성가셨나 보았다. 좀 떨어지라고 여러 번 밀어냈다. 몇 번 퇴짜를 맞으니까 아버지가 웃으면서 불러준 별명이 하필이면 똥칠거지다. 그렇게 거부를 당하면서도 엄마가 그리도 좋았던지 이후로도 나는 여러 번 엄마 등에 거머리처럼 붙으려고 했다.
번번이 퇴짜 맞는 내가 안 되어 보였는지 아버지는 이리 오라고 하시면서 안아주었다. 그 이후부터는 거의 아버지가 보살펴 준 기억이 많다.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여동생은 일곱 살까지 아기였다. 늘 엄마가 업고 다녔고 난 찬밥이었다. 곧이어 남동생이 태어나자 여동생도 찬밥신세로 전락했으나 나만큼은 아니었다. 난 두 살 때부터 아기가 아니었다. 밑에 여동생을 미워한 적은 없지만 그냥 엄마 냄새가 좋았다.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편안했다. 오늘, 아니 이따금 기억하기 싫은 아프면서도 그 아기가 안쓰럽고 가엾다.
아버진 거침없이 말하는 유형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아버지를 닮아있다. 똥칠거지라고 놀리면서 내게 냉정하게 대하시는 엄마를 나무라기도 했다. 몇 년 후 웃으면서 후일담처럼 똥칠거지 별명을 짓게 된 연유를 말했다. 그 별명이 너무 원색적이고 부끄러웠던 나는 울면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 난 후 더 이상 똥칠거지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이따금 지나가는 말로 내가 그렇게 엄마 등에 붙었노라고 말했다. 그 별명이 어린 내겐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별명은 기억에서 뭉개버리고 싶었다. 엄마에게 거부당했다는 여린 잎의 상처와 함께.
유년 시절은 아버지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도 아버지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입학생들이 빼놓지 않는 흰 코 닦는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서였다. 아버지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다녔고 줄 서 있는 내 옆을 지켰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내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셌던 나는 엄마한테 그리 예쁜 딸이 아니었다. 내리 딸만 셋을 낳았으니 남아선호사상이 아주 강했던 시대였다. 그런 내 고집을 유일하게 들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내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해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내 수저를 사달라고 요구했으니 없는 살림에 엄마는 내가 미웠을 법도 하다. 그런 내 주장으로 언니와 일찍 수저 세트를 챙겼다. 물론 그 후로 내 수저가 아니면 밥상을 거부했다.
먹고살기도 빠듯한 가난한 살림에 난 좀 까탈스러웠던 것 같다. 어쩌면 엄마한테 거부당한 내가 불쌍해서 아버지가 계속 들어줘서인지 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고 나무라면 숟가락을 집어던지면서 울었다. 서 있으라고 벌을 주면 끝까지 서 있으면서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내가 계란찜을 먹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아버지한테 싫은 소리 듣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애가 먹고 싶다는 것 해주라는 아버지의 명령 아닌 명령이었다.
난 덜렁거리는 언니에 비해 차분한 편이었다. 언니와 함께 입학 전에 아버지께 한글을 배웠다. 두 살 많은 언니보다 내가 더 잘할 때가 많았다. 언니는 꾸중 듣고 나는 칭찬받았다. 내가 항상 칭찬의 연속이었다면 언니는 덜렁거린다고 ‘털피’ 라는 별명이 붙었다. 난 칭찬받는 데 고무되어 어떻게 하면 계속 칭찬받을지 고심했던 것 같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서 인정의 욕구는 4단계로 높은 단계이다. 초등학생과 수업하다 보면 대부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나 역시 엄마한테 거부당했다는 충격이 있었는지 아마 무의식적으로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었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나는 어린아이치고는 맹랑했다. 뭐든 돋보여야 살아남는다는 본능이 발동했음인지 그 이후부터는 칭찬을 달고 살았다. 항상 아버지는 ‘기특하다, 찬찬하다, 예쁘다’를 빼놓지 않았다. 이후 난 학교나 집에서 아주 착한 모범생이었다. 또한 칭찬을 놓치지 않고 계속 받고 싶었는데 어쩌면 칭찬이 나 스스로에 대한 족쇄가 되었다.
이제 아버진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엄마는 연로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냉정하던 엄마는 이십여 년을 내게 의지했다. 내가 일찍 철이 들어서 엄마를 살뜰히 챙겼지만 여전히 엄마는 내게 냉정하시다. 아버지가 만약 살아있다면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을 텐데 너무 일찍 떠나버린 아버지가 때론 야속하고 너무너무 그립다. 난 왜 아버지만 생각하면 아리고 눈물이 나는 건지…….
“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은 제게 아무런 방패막이가 없어요. 이젠 ‘똥칠거지’라고 놀리셔도 좋으니까 곁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그러셨죠? 절대 기죽지 말고 제가 최고라고요. 저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코피 터지게 해도 된다고, 아버지가 다 책임지신다고요!”
*똥칠거지: '똥 칡'이라는 경상도 방언으로 엄마 등에 바짝 붙어 있으니 엉덩이에 칡처럼 엉겨붙는다는 비유적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