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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따뜻한 손

by 글마루

아버지의 따뜻한 손

내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의 아주 깊은 골짜기에 있다. 사방이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솔밭마라는 작은 마을에서 나는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70년대 초반 내가 성장할 무렵에는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위해 가속도가 붙을 시기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마을에 집들이 다닥다닥, 옹기종기 제법 여럿이었는데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하나둘 마을을 떠나는 젊은이가 늘어나고 서울로 상경하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들불처럼 번지던 때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릴 때 기억이 생생한 것이 많다. 세 살 때 기억까지 선명한 것으로 남들보다 기억력은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몇몇 장면은 지금도 대사까지 또렷할 정도로 내 기억에서 정지되어 있다. 즐거웠던 기억보다 상처받은 기억이 더 오래가는 것일까. 젖먹이 동생을 안고 있던 엄마가 나를 밀어냈던 일, 부엌에서 엄마의 밥이 다 되었다는 소리에 숟가락을 들고 있던 내가 환호하다가 실수로 아버지 뺨을 때려 아버지에게 쥐어박혀 울었던 서러움은 왜 그리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건지.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은 삽화처럼 또렷하게 저장되어 있다. 그 외에도 서러웠던 기억은 또 있다.


하루는 큰집 사촌 언니가 언니와 함께 동산을 넘어 건넛마을로 놀러 가자고 했다. 사촌 언니와 나보다 덩치가 월등히 좋은 언니는 동산의 언덕을 쉽게 올라가는데 나는 자꾸만 미끄러졌다. 아기나 진배없는 네 살배기(내 기억에 서너 살인데 사촌 언니가 무얼 물으면 “내가요.”가 아닌 “나가요.”라고 대답했고 그걸 두고 신기한 듯 웃은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내가 말을 아주 빨리 배우고 잘한 것으로 많아야 네 살일 것이다.)의 몸으로 마른 잔디 깔린 눈길에 고무신을 신었으니 오를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언덕 높이의 동산은 태산처럼 높아 보였다. 올라가다 미끄러지기를 반복할 때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출발하기 전부터 사촌 언니는 나를 두고 언니만 데리고 넘마라는 이웃 마을에 놀러가려고 했지만, 나를 꼭 데리고 다니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는지라 아버지에게 혼날 것을 걱정한 언니가 머뭇거렸다. 사촌 언니는 나를 버려두고 둘이 가자고 했다. 둘은 야속하게도 나만 버려두고 언덕길을 올라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기나 마찬가지인 나는 집에 돌아가는 길도 제대로 몰랐기에 언니가 사라진 쪽으로만 따라가려고 했다.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은 넘어지면서 땅바닥의 눈을 짚어 시리고 아렸다. 눈 속에 파묻힌 내 손에는 물기가 흥건했고 시린 손은 너무 아팠다. 한참을 오르려다 미끄러지기만 반복하다가 살을 에는 따가움과 속상함이 더해진 나는 엉엉 눈물 바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아버지는 놀라서 펄쩍 뛰셨다. 나는 내 속상함과 서러움까지 덤으로 얹어 나를 버리고 간 언니를 원망했다.


그런 내게 아버지는 “에이 녀석, 집에 오기만 해라. 내 언니 혼내줄 테니 울지 마라.”라고 하시며 엄마에게 찬물을 떠오라고 한 뒤 내 손을 담그라고 하셨다. 차가워 싫다는 내 말에 그래야 동상이 걸리지 않는다며 겁내지 말라고 하셨다. 언 손이 어느 정도 풀리자 아버지는 “많이 춥지? 동상 걸리면 큰일 난다…….”라고 하시며 아버지는 따뜻한 손으로 나의 차가운 손을 꼭 쥐며 언 손이 다 녹을 때까지 주물러 주셨다. 훌쩍훌쩍 흐느끼던 나는 내 손이 따뜻해질 무렵 속상함도 눈 녹듯 사라졌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온 언니와 사촌 언니는 아버지께 큰 꾸지람을 들었고 그 모습을 본 나는 서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유난히 날씨가 차고 눈이라도 펑펑 내리는 날이면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하던 기억보다 아버지 손의 따뜻함이 유독 그리워진다. 급한 성격에 고함도 잘 지르고 목소리도 컸지만 자식을 향한 속정은 세상 누구와 비교해도 가장 따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내편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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