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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고모 집

고모의 사랑

by 글마루


사람들은 가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면 유년 시절을 떠올리고는 한다. 어쩌면 그때가 세상이라는 거대한 세상과 맞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가장 보호를 많이 받았던 시기여서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에게는 ‘의존 욕구’가 있는데 부모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인정받고 보호받고 싶은 욕구이다. 내게 정서적 안정감을 준 사람을 꼽으라면 부모님 다음으로 큰고모라고 할 수 있다. 캐시미어로 짠 빨간 스웨터의 감촉처럼 따뜻하고 밝음이 연상되는 고모. 그래서인지 문득문득 고모의 등이 그리울 때가 있다. 무조건 나를 수용해준 너그럽고 넉넉한 고모의 마음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눈보라가 온 세상을 삼킨 날이었다. 네 살이던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 충북 보은군 임한리 고모 집으로 향했다. 끝도 없이 휘몰아치는 눈 폭풍이 아직도 눈에 생생할 만큼 매서운 날씨였다. 아버지는 나를 업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좁은 길을 면 소재지까지 걸어서 갔다. 집에서 나서기 전 날씨가 안 좋아 망설이는 대화를 부모님이 나누었지만 출발하고부터는 눈과 바람의 기세가 매우 사나워졌다. 칼바람과 내려치는 눈보라로 눈을 뜰 수 없었고 얼굴이 따가웠다.


처음에는 그냥 업혀서 갔으나 눈발이 사나워지자 아버지는 외투로 나를 폭 덮으셨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엄동설한에 아버지는 무슨 고행이라도 하듯 먼 길을 걷고 또 걸으셨다. 겨우 한 번의 버스를 타긴 했지만 눈이 많이 내려 버스가 꼼짝할 수 없어 다시 걸어야 했다. 도무지 고모 집은 어디인지 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가끔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보면 주먹 같은 눈송이만 하늘에서 마구 쏟아질 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옷도 변변찮은데 어린아이까지 업고 눈길을 헤쳐 간 아버지는 고모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질 듯하셨고, 고모는 이런 날씨에 어찌 왔느냐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다.


몇 십리 길을 눈보라를 헤치며 걸어오신 아버지는 오한이 난다며 주무셨고 고모는 나를 업고 어딘가로 향하셨다. 지붕이 낮고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초가집에 갔는데 닭이 여러 마리 있었다. 어떤 닭은 처마에 짚으로 엮은 닭둥우리까지 날아서 앉아 있기도 하고, 어떤 닭은 마당을 이리저리 쫓아다녔다. 닭들이 낳아놓은 달걀을 고모는 조심스레 바구니에 담았다. 금방 낳은 달걀을 집으로 가져와 저녁상을 차리셨다. 달걀찜에 구운 김, 나물무침에 고깃국까지 밥상은 진수성찬이었다. 남동생과 질녀가 왔다고 고모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정성을 다하셨다. 우리 집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진귀한 반찬이었지만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고모부 얼굴을 보자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모부는 매우 점잖은 분이셨는데 낯선 얼굴이 무서웠던 나는 밥도 못 먹고 혼이라도 난 아이처럼 서럽게 울어댔다. 고모가 우는 나를 달래며 밥을 떠먹여 주셨지만 고모부 얼굴만 보면 많이 먹으라는 덕담에도 울음을 터뜨리고, 어쩌다 눈만 마주쳐도 앙앙 울어댔다. 아버지와 고모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내겐 낯선 고모 집과 근엄하신 고모부가 무섭기만 했다. 그래서 아버지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다음 날 아침에도 역시 달걀찜에 들기름으로 구운 고소한 김까지 밥상에 올랐지만 나는 아버지 옆에만 꼭 붙어 고모부 눈치만 연신 봤다. 아침 식사 후 아버지는 쉬겠다고 옆방으로 가셨고 고모가 나를 업고 동네 사람들 집에 마실 가셨다. 나는 한 살 차이 동생이 있기에 엄마한테 살뜰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인지, 업어주는 고모의 등이 엄마 품처럼 아늑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고모는 무한의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셨고 나는 고모 집에 있는 내내 막내딸처럼 업혀 다녔다.


고모 집에는 오빠 둘과 언니가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와서는 어린 나를 귀엽다며 번갈아서 안아 주었다. 고종사촌들이 모두 내게 관심을 보이며 예뻐해 주었고, 나는 고모 집의 막내딸이라도 된 듯 귀염둥이가 되었다. 가끔 고모부와 마주치는 게 어렵고 무서웠지만 고모 집에 있는 동안 나는 공주나 마찬가지였기에 어리광도 많이 부렸다.


그 후로도 여섯 살 무렵 아버지랑 고모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이미 낯이 익었던지 전보다는 고모부가 덜 무서웠다. 오빠들과도 더 허물이 없어져 장난까지 치게 되었다. 마당의 우물을 사이에 두고 오빠들은 나를 번갈아 안으며 빠트리겠다고 겁을 주고 나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댔다. 고모 내외분의 선한 마음을 그대로 물려받은 오빠들은 고모만큼 사촌인 내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줬다. 어떤 눈총도 없이 온전히 마음을 열고 품어주는 안락함은 흔들의자에 앉아 여유를 누리는 것처럼 포근하고 평화로웠다.


십여 년이 지난 후 외갓집인 큰집에 찾아온 고종사촌 오빠들을 만날 수 있었다. 훌쩍 자란 나를 본 오빠들은 예전에 내가 맞느냐고 놀라워했다. 부끄러움이 많은데다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던 나는 이미 성인이 된 오빠들이 어색해 대답도 못 하고 우물거렸지만 내 마음속의 오빠들은 여전히 늠름하고 멋진 청년이었다.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친엄마를 일찍 여읜 아버지는 제일 큰누나인 보은 고모에게 자주 찾아가셨다고 한다. 큰누나에게서 엄마의 사랑을 느끼셨던 걸까. 열다섯 살 때는 돌아가신 엄마도 보고 싶고 배가 고파 혼자서 오십 리가 넘는 산길을 넘어 고모 집에 가셨다고 했다. 어렸지만 그 얘기를 듣고는 일찍 엄마 잃은 아버지가 참 가여웠다. 고모는 그런 아버지를 애달파 하셨고 이따금 보리쌀도 몇 되씩 들려 보내곤 하셨다고 한다. 어린 아버지가 누님 집에 가면 그런대로 동네 유지인 고모네는 아무리 춘궁기라도 보리밥은 실컷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청소년기에 유일한 의지처는 큰고모였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힘을 얻게 된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봐 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 것이다. 그건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버지는 고모만 보면 “누님, 누님” 하며 고모와 허물없이 지내셨다. 그런 아버지를 고모는 자식이라도 되는 양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주셨다. “우리 OO이 엄마 일찍 잃고 고생 많이 했지.”라고 하시며 늘 아버지의 어깨를 토닥여주셨다.


엄마는 아버지보다 더해서 아예 친정에 가족이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모른다. 워낙 어릴 때 전쟁 통에 헤어져 가족들의 이름조차 모른다. 외가나 이모가 없어 마음 한쪽이 늘 허전했던 우리에게 고모들은 참 따뜻하고 인정스럽게 대해주셨다. 비단 보은 고모뿐만 아니라 다른 두 분의 고모들도 가끔 뵙기라도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예쁘고 착하다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셨다. 그래서 세상의 고모들은 다 마음이 너그럽고 인정이 넘치는 줄 알았다. 어쩌면 아버지와 고모들의 우애는 할머니가 부재한 상황에서 더 깊어졌을 것이다.


이젠 아버지도 고모도 돌아가신 지 오래. 동생인 아버지와 조카인 우리에게 혈육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신 고모님. 고모 등에 업힌 따뜻함은 지금도 가슴에 뭉글뭉글 목화솜처럼 포근하게 남아 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처럼 잠시 소풍 나온 세상에서 노닐다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고모님의 얼굴을 가만히 그려본다. 고모 등에 업힌 어린 소녀의 재잘거림이 발치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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