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하고 나하고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노래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불렀던 곡이었다. 일곱 살 어린 나는 그 노래를 부를 때면 아빠가 옆에 있고 예쁜 꽃들이 활짝 핀 꽃동산을 상상했다. 그 노래가 그리 좋고 불러도 불러도 질리지 않았다. 어릴 때는 노래도 곧잘 불러서 아버지한테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 칭찬에 힘입어 나도 티브이에 나오는 동요대회에 나간다고 했다. 오지의 산골에서 현실적으로 어림없는 일이었지만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언젠가는 나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목이 터지도록 불렀다.
엄마는 언니를 데리고 면 소재지 오일장에 가시고 동생과 둘만 남은 나를 아버지는 지게에 태우셨다. 바소쿠리를 얹고 그 위에 태우신 것이다. 처음에는 무섭다고 겁을 냈지만 동생과 나란히 지게 기둥을 하나씩 붙들고 나중에는 오히려 신나 했다. 게다가 구경도 하기 힘든 껌을 한 통씩 사서 들려주셨다. 십 원짜리 껌이었지만 우리는 둘 다 신이 났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놀고 있으라고 하셨다. 우리에게 무슨 얘긴가를 하시기도 하고 노래를 흥얼흥얼거리며 낫질을 하셨다. 금세 지게 가득 풀이 쌓였고 집으로 돌아오자, 마침 엄마도 장에서 돌아오는 중이셨다. 엄마는 우리 손에 들려있는 껌을 보고 돈도 없는데 사줬다고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해대셨다. 아버지는 애들 잘 놀라고 사줬다며 얼버무리셨다. 이후에도 동생과 나는 아버지의 지게를 탈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지게 타기에 재미를 붙인 나는 자꾸 태워달라고 졸랐고, 나중에는 빈 지게에 일부러 태워주기도 하셨다.
백토에 있는 논에 아버지가 논둑을 깎는다면서 따라가자고 하셨다. 원래 백토는 우리 마을에서는 많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 땅 색깔이 희어서 백토라고 이름이 지어진 듯 싶다. 우리 소유의 땅이 없던 아버지는 종중 땅을 부쳤다. 그 대가로 도조를 조금 내기도 하고, 옛 조상들의 묘를 벌초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종중 땅이라는 것이 넓고 좋은 위치는 우리 차지가 될 수 없었다. 그런 땅은 그나마 살만한 집 차지가 되었다. 우리 집은 어느 골짜기, 남들이 짓기 꺼려하는 곳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백토는 지름길인 높은 산을 넘으면 바로 갈 수 있었으나, 산의 경사가 워낙 가파르고 험해 어린 내가 가기에는 위험했다. 그래서 평평한 길로 돌아서 갔다. 가는 길에 남들은 모심기를 놉을 얻어서 하는데 왜 아버지는 힘들게 직접 다 하시냐고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놉을 얻으면 편한데 그렇게 하면 농사를 지어도 품삯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오십 원짜리 티나크래커를 사주셨다. 나는 평소에 구경하기도 힘든 과자를 아버지께도 건네며 어깨춤을 추었다.
아버지는 논둑을 깎으시고 풀을 모아놓으면 내가 그 풀 더미를 안아서 논 가장자리로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풀을 깎아놓으면 난 지체 없이 버렸다. 점심때가 되어 아버지는 나뭇가지를 깎아 젓가락을 만드셨다. 그리고 싸 온 도시락을 함께 먹었다. 나무 그늘에서 아버지와 다정하게 먹는 도시락은 꿀맛 같았다. 우리 부녀는 친구처럼 수없이 많은 얘기들을 나누며 논둑을 깎고 풀을 버렸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우리와 친구처럼 놀아주셨다. 겨울엔 농한기라 한가하니까 엄마가 아침밥을 할 동안 아버지는 내 발을 아버지 발등에 얹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셨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언제나 이런 가사의 노래만 부르셔서 나는 ‘아빠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 놀이의 이름은 ’아빠까‘가 되었다. 아버지는 지칠 때까지 계속 우리에게 발등을 내어주셨다.
1학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아버지는 안 되겠다며 업히라고 하시고는 나를 업고 학교까지 바래다주셨다. 동네 친구들이 아버지 등에 업혀서 가는 나를 보고 아기라고 놀렸지만 나는 오히려 어깨가 으쓱했다. 당시 자식을 업어주는 아버지는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마치고 중간쯤 오다 보니 역시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길이 미끄럽지 않았냐고 물으시며 내 손을 잡으셨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아버지는 눈이 많이 내리면 꼭 마중을 나오셨다. 마중 나와 내 손을 잡을 때면 난 의기양양해졌다. 아버지만 옆에 계시면 세상에 겁날 게 없었다.
어느덧 자라 초등 5학년 무렵, 사춘기가 가까워 더 이상 업히지 않으려는 내게, 약초를 밟으려면 무게가 무거워야 효과가 있다는 말씀으로 한참이나 업어주셨다. 그땐 미처 몰랐는데 그건 나를 업어주고 싶은 핑계였다. 이젠 내가 아버지를 업어드려야 하는데 곁에 안 계시다. 오로지 아버지와 있었던 추억만이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귓가에 노랫소리가 쟁쟁거린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