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좋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어젠 작년에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과 바람을 쐬기로 했다. 그런데 3월 신학기 준비로 가뜩이나 바쁜 데다가 업무처리로 무리를 했는지 며칠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다녀왔는데도 아침에 눈 뜨기가 어려웠다. 지난주는 아침에 일어나려면 항상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운 것이 금방 몸살이라도 날 것처럼 힘들었다. 잇몸도 부어오르는 것이 분명히 몸에 무리가 가긴 갔나 보다.
역시 자고 일어나니 약간의 두통과 잇몸이 부어오르고 눈까지 부었다. 약속을 했는지라 간단한 간식거리를 챙겨 약속 장소로 갔다. 내 안색을 살핀 선생님이 몸이 안 좋아 보인다고 하신다. 몸이 안 좋다고 누워있어 봐야 오히려 몸만 더 아플 것도 같고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졌지만 나도 어딘가로 바람을 쐬고 싶었다. 게다가 그 선생님은 여느 선생님에 비해 성격이 활달하고 농담을 잘하셔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언니 같았다.
둘은 괴산 산막이옛길로 향했다. 내가 손수 운전해서는 처음 가보는 길에 나는 옮긴 직장에서의 어려움을 속사포처럼 풀어놓기 바빴다. 선생님은 올해 37년 간의 교직생활을 끝으로 퇴직 이 년 여를 남기고 명예퇴직하셨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스스로 나이 듦에 따른 부담과 갓 결혼한 따님의 출산 후 육아를 돕기 위함 등의 이유로 퇴직한 것이다. 퇴임식이 있는 날 친한 선생님 두 분이 동시에 퇴임하셨는데 인사말을 들으면서 그분들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니 사연을 다 듣지 않아도 녹록하지 않았을 교직생활이 짐작이 가 울컥했다. 그러면서 나는 고생한 그분들께 마음의 박수를 열렬히 쳐줬다.
지난주 내가 보고 싶다며 전화가 왔을 때 선약이 있는지라 만나지 못하고 약속을 잡았다. 작년에 내가 처음 근무하는 낯선 학교에서 아침마다 정수기에 물을 받으러 오셔서는
"귀엽고 예쁜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라고 먼저 인사를 해주셔서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가끔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하고 연구실에 갈 때면 꼭 아는 척을 해주셔서 학교가 낯설지 않았다. 그 선생님 덕분에 일 년 동안 어색하지 않게 근무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젊은 교사가 대부분인 학교에서 나이 든 교사는 나름대로 눈치를 보고 소외감을 느끼는지 '외롭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내 입장에서는 정교사에 그것도 직함이 있는 교사는 남 부러울 것 없으리라 여겼는데 그것은 밖에서 바라본 교직사회의 속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고 어느 직업이나 쉬운 것이 없다는 것을 나는 기간제교사 일 년 꼬박 근무하면서 알 수 있었다.
또한 같은 상주에 거주지를 두고 있어서인지 내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 친절하면서 자존심 상하지 않게 알려주시고 언제든지 궁금한 것 물어보라면서 마음을 열어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내가 외향적이고 사교적이고 당당해 보인다고 말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처음 근무하는 직장, 동료들에 대해 낯가람이 없지는 않다. 단, 그걸 극복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나이를 떠나 마주치는 교직원에게 항상 먼저 인사하며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웃는 얼굴이 되었다.
올해부터 다른 학교에 근무하면서 일단은 너무 바빠서 선생님들과 소통할 시간이 없었지만 학교마다 다른 체제와 새로운 사람들과 업무를 같이 보려니 거기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커긴 했다. 그럴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으니 바로 이 선생님이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 입장에서 조언을 해주시고 어려움을 다 들어줄 것 같아서이다. 퇴근하면서 선생님이 생각났지만 실례가 될까 봐 연락도 하지 못한 채 망설이던 차 먼저 전화가 온 것이다.
선생님은 차에 오르자마자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우린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도착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떠느라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주는 길을 지나칠 뻔했다. 꼭 어디를 가서 좋은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다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좋아서이다. 주차하고 산책로로 들어서는데 입구에 상점에서 버섯 파는 게 눈에 띄었다. 싱싱하고 탐스러운 버섯이 값도 저렴하고 양도 푸짐하기에 돌아오는 길에 사기로 했다.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인지 조금씩 오르는데도 걸음이 늦고 뒤로 처지자 선생님은 확실히 몸이 안 좋은 모양이라며 걱정을 하셨다. 작년에 충주댐 종댕이길을 갔을 때는 내가 성큼성큼 가고 선생님은 힘들다며 뒤처졌는데 이젠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기운이 없었지만 길 가에 막 몽우리를 열기 시작하는 진달래꽃을 바라보며 반가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산책길에 간간이 서 있는 벚꽃도 꽃을 피우기 위해 몽우리를 열기 시작했다.
바람이 몹시 불어서인지 괴산호는 바다처럼 파도가 물결쳤다. 미리 일기예보를 보고 두꺼운 옷을 갖춰 입었는데도 걷는 내내 한기가 느껴졌다. 봄은 소리 없이 온 듯하다가 갑자기 쌀쌀맞은 게 시어머니 심술처럼 얄궂다. 지난주만 해도 한낮에는 더워서 지치겠더니 갑자기 다시 겨울이 온 듯 추운 날씨에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천천히 두 시간 정도를 걷다 보니 전이나 도토리묵을 파는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을 간단하게 챙겨 먹긴 했지만 배가 고팠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기에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비닐하우스로 만든 식당 안은 손님들로 꽉 찼다. 커다란 무쇠 난로에는 불을 피웠는지 후끈후끈해 차가워진 몸을 잠시 녹이고 둘은 파전과 도토리묵무침으로 점심을 겸해 먹었다. 기름기 도는 파전이지만 맛은 괜찮았다. 산책으로 배가 고픈 둘은 허겁지겁 맛있게 접시를 비웠다.
산책을 더 하기는 이미 무릎도 아프고 지쳤는지라 우린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뜩이나 심상찮은 날씨가 갑자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금방 그쳤다가 햇빛이 나타나기도 하고 또다시 진눈깨비가 내리는 것이 날씨 변덕이 극심했다. 갈 때는 기운이 없어 별로 보이지 않던 진달래가 길 곳곳에 무리를 이루어 피어 있었다. 잠시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종착지가 가까워졌다. 처음 입구에 봐둔 가게에서 버섯을 두 가지 사서 우린 차에 올랐다.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졌다. 굵다란 눈송이가 차를 달리는 내내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마지막 눈을 구경하라는 듯. 오전 아홉 시에 출발했는데 돌아가려니 벌써 오후 두 시가 넘어 있었다. 게다가 눈이 쌓이면 도로가 걱정이 되었기에 우린 서둘러 상주를 향해 달렸다. 문경 정도 올 때까지 눈보라가 마구 쏟아지고 산과 나무에 눈이 쌓이더니 점촌을 지나자 언제 눈이 왔는가 싶게 날씨가 개이기 시작했다. 산불 때문에 흐렸던 하늘이 파랗게 보이고 간간이 구름이 떠 있는 모습을 보자 안도감이 찾아온다.
괜찮다고 입소문 났다던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기로 하고 주차한 후 안으로 들어서니 생각 외로 세련되고 깔끔한 인테리어에 소녀처럼 들뜬 기분이 되어 커피와 빵을 주문하고 널찍한 창가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커다란 창을 통해 본 시골의 풍경을 바라보니 그대로 그림이 된다. 멀리 바라보이는 공갈못 벚나무는 불그레하게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추위에 떨다 온 우리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잠시 해바라기가 되어 본다. 주부들이 생각하기에 커피값이 저렴하지 않지만 커피값에는 카페의 자릿값도 포함된 것이다.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산책의 피로를 녹이며 햇살을 받으니 이 순간이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이미 퇴직한 본인과 친구 해줘 고맙다고 하지만 나 역시 어떤 목적이 없기에 언니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앞으로 둘이 여행 친구하자며 우린 다음을 기약했다. 만남에 부담이 없고 함께 여행 다닐 수 있는 친구가 가까이 생겨서 무척 다행이다. 동료로 근무할 때보다 사석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니 사람의 삶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과 어떤 조건이나 계산이 없는 이런 만남만큼 좋은 인연도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주말 하루 즐거움의 탑을 견고하게 쌓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