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움과 함께 찾아온 근심
십 년 동안 종무소식이었던 언니가 어느 날 연락이 왔다. 먼저 집으로 전화가 왔는데 언니의 전화를 받은 엄마는 기쁨에 들떠 내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는 순간 막혔던 배수구가 뚫린 것처럼 후련함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단 한 번의 소식조차 알 수 없었던 우리 집엔 언니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경사였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 남동생이 같이 있었던 때였다.
그동안 형제간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면 나는 언니가 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있다고 하면 어디에서 뭘 하는지 물어보았기에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나는 입장이 난감해졌다. 사실대로 시시콜콜 사연을 다 말할 이유나 필요가 없는 데도 그 짧은 갈등의 순간이 싫었다. 정말 친한 친구에게만 사연을 말한 채 나는 내 기억에서 언니를 지웠다 뺐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없다고 대답하고 나면 언니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미안함과 가책이 몰려왔기에 그것이 나를 옭아매는 올가미처럼 나를 묶어놓았다.
시댁이나 남편에게도 언니의 부재로 인해 좋지 않은 인상을 심었고 가난한 친정에 대한 대놓고 무시와 모멸을 참아내야 했다. 시댁이라고 평범하거나 어엿한 가정이 아님에도 그들의 가족사는 꽁꽁 숨긴 채 남의 약점이나 허점이 있으면 끄집어내어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려는 듯 비쳤다. 손 아래 시누이와 한마을 언니가 같은 직장에 다녔는데 그 언니가 내가 어릴 때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고 효녀였다는 칭찬을 했음에도 시아버지는 부모가 다 있는데 어릴 때부터 무슨 고생을 했느냐며 의아해했고 마지막엔 엄마가 계모인지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으나 이미 시댁의 가정사를 다른 이에게 귀띔으로 들었던 터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 부분은 거론하지 않았다.
사실은 시댁이 배 다른 가족 구성원이었는데 내게는 철저히 숨기며 두 분 중 한 분이 돌아가시면 내게 의탁하려고 미리 부담을 줬다. 한마디로 초장에 며느리를 확 후려 잡아서 자신들의 노후를 책임지게 하려는 속내였기에 나를 보기만 하면 시아버지는
"둘 중 하나가 죽으면 우린 너네 집으로 갈 테니 그리 알아라."
라고 하시며 아직 어린 둘째 며느리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게다가 남편은 내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형님네가 있는 데도 부모님은 자기가 모실 거라며 쐐기를 박았다. 정작 모셔야 할 사람은 나인데 나만 빼고 그들끼리 미리 모의한 것 같은 결정에 부당하다 여겼으나 입 밖으로 낼 용기조차 없었다. 자식이라면 누구든 부모를 모셔야 하는 게 도리이자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니가 돌아왔으니 가끔 툭툭 던지듯 꼬집는 시댁 식구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아서 안심이었다. 뭔가 커다란 비밀을 품은 죄인처럼 나는 어느 한 가지 당당하고 떳떳하지 못했다. 같은 시골이라서 실제 생활에서는 큰 차이가 없음에도 돼지고기라도 먹을라치면
"산골에서 이런 고기 구경이나 했겠냐?"
라고 하셨고 없는 집에서 부잣집에 시집와 호강하는 것처럼 큰소리를 치셨는데 실상은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야 할 만큼 박봉으로 생활했다. 나는 억울한 면이 많았지만 친정부모님이 자식 잘못 키웠다는 소리 듣게 하기 싫어 부당해도 꾹꾹 참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우울증이 왔는지 밤에 잠을 못 자고 우는 날이 많았다. 도무지 내 마음에는 맑은 날이 없었고 날씨와 무관하게 내가 바라본 세상은 짙은 먹구름이 늘 가득했다.
내 편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든든함과 힘을 발휘한다. 언니가 돌아오고 나는 장녀 아닌 장녀의 굴레에서 좀 벗어나지 않을까 안심했다. 무엇보다 볼 때마다 언니의 얘기를 꺼내며 그리워하고 속상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지 않아서 후련했다. 엄마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아졌기에 그것만으로도 안심이었다. 나도 언니와 통화를 했으나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함이 목소리를 타고 전해졌고 뭔가 맑지 않고 탁한 그 목소리로 언니의 지난 세월이 가늠되었다. 지지리도 궁상인 집이 싫어 떠난 언니가 금의환향은 못해도 근심 덩어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향 집에 가서 언니를 만났는데 언니는 예전보다 많이 달라져있었다. 웃으며 반겼지만 얼굴도 변하고 목소리는 탁해지고 갈라진 것이 세상이라는 파도에 이리저리 표류하다 겨우 뭍으로 나온 듯 초조함이 느껴졌다. 씀씀이가 큰 언니답게 가족들의 선물을 샀다며 주는데 나는 그 선물은 안 받아도 좋으니 더 이상 혼돈만 몰고 오지 않기를 바랐다. 친정은 잔칫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손수 장을 보고 언니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렸고 언니를 공주 모시듯 떠받들었다. 그러면서 그간의 가슴앓이를 풀어놓으며 또 울먹이다가 세상을 다 얻은 듯 활기가 넘쳤다. 그동안 그리도 아프다더니 거짓말처럼 생생한 엄마의 모습에 나는 그저 안도하고 또 안도할 뿐이었다.
고향에 온 언니는 대구에 살았다고 했다. 그리 멀지도 않고 버스만 타면 올 수 있는 거리를 어찌 그토록 집과 단절했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거니 여겼다. 여동생과 내가 사는 구미에 언니가 방문했고 우리 집에서도 며칠 묵었다. 엄마도 함께 동행해 돌아온 언니를 극진히 대접할 것을 요구했고 나는 성의를 다해 밥상을 차리고 언니에게 동생이 아닌 언니처럼 챙겼다. 언니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면 얼버무리기 일쑤였고 답을 피하는지라 더는 캐물을 수 없었으나 뭔가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분위기를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나 되었을까. 부모님과 통화를 하던 중 언니가 빚을 진 게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엄마는 내게 은근히 언니를 도와줬으면 했지만 가뜩이나 남동생을 데리고 있는 데다 출산 비용에 아파트 대출금까지 갚고 있었는지라 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엄마의 제안이 말도 안 된다고 도리질했다. 인정으로야 친정식구 누구인들 다 해주고 싶지만 내 몸이 두 개라면 하나를 팔아서 해결이 된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나 역시 금이 간 얼음판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함을 안고 있었기에 거절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가 큰아버지에게 받은 금반지를 언니가 골방에 들어가서 찾고 있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고 나는 '제 버릇 개 못준다'라는 옛 속담이 떠올랐다.
언니가 돌아와서 좋은 건 아주 잠시였다. 언니는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고 내가 여유가 없다고 하자 여동생에게도 따로 연락해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여동생 기숙사에서 같이 밤을 보내며 편지처럼 메모지에 썼다는 글이 모두 '돈이 없다, 돈이 필요하다'라는 메모로 빽빽했다던데 여동생은 마음이 약해져 적금을 깰까 하다가 어느 순간 속 보이는 언니의 행동에 마음을 바꾸었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반가움도 어느덧 사라지고 우리에게 언니는 '돈'이라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 고민과 한숨은 다시 눈덩이 굴리듯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