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의 서늘한 눈빛

죄책감의 발로

by 글마루
ChatGPT Image 2025년 5월 15일 오후 04_14_53.png

동생이지만 내 내면에는 자식처럼 아픈 손가락이 된 남동생은 결국 우리 집을 떠났다. 난 너무나 미안했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선 팔 한쪽을 잘라내는 심정으로 남동생을 내보냈다. 내가 살던 집과 멀지 않은 주택 단지에 방을 얻고 계약금을 걸었으나, 그 방을 본 엄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른 방을 알아보러 다녔다. 우리 집에 와서도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안 하고 같이 가보자는 내 말에도 들은 척 만 척하더니 남동생과 택시를 타고 떠나버렸다. 나를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냉랭한 엄마의 태도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아들을 업고 겨우 쫓아갔으나 엄마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계약금만 날린 채 방을 구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방을 구하다가 허탕치고 돌아온 엄마는 사위와도 아는 척하지 않고 사위 역시 장모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우리 집에 처남 못 데리고 있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엄마는 엄마대로 섭섭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불안함에 나는 안절부절했다. 아버지가 위암수술받고 항암치료 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다. 통증으로 진통제가 듣지 않아 패치를 붙이며 앉은 채 잠을 자야 했다. 암이 허리까지 번진 것인지 통증으로 누울 수 없었다. 남동생을 데리고 있느라 지출을 알게 모르게 많이 한 걸 안 남편은 우리도 살아야 한다며 냉정하게 외면했다. 병원비 한 푼 보태줄 수 없었기에 비상금 모은 걸 몰래 조금씩 보태줄 뿐이었다.


그때 나는 두 돌도 되지 않은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시작했다. 내가 일해서 돈이라도 벌어 아버지 치료비라도 보태고 싶었다. 아픈 아버지께 마음껏 약을 써보지도 못하는 내가 너무 초라하고 작게 여겨졌다. 진퇴양난, 백척간두에 처한 친정을 외면한 남편에게 한이 맺힐 정도로 야속했다. 그렇지만 그 입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미 우리 가정이 있기도 했고 그 상황에 도와준데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을 만큼 땅 사느라 빌린 빚에 언니 공부시키느라 진 빚, 엄마가 아파서 진 빚, 아버지 위암수술과 항암치료로 진 빚은 우리 재산을 다 처분해야 상환할 수 있는 거액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내가 집이라도 가지고 있어 제일 나았기에 엄마는 형편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사람을 내쫓을 수 있느냐고 서슬이 시퍼런 채 원망스러운 말을 분수처럼 토해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방세에 대한 부담 때문에 남동생은 방학 때 아르바이트하던 컴퓨터 가게에 의자를 놓고 기거하기로 했다. 시댁과 남편의 대놓고 하는 반대만 아니라면 당분간이라도 데리고 있고 싶었던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 동생을 떠나보냈다. 나는 죄인처럼 엄마와 남동생을 볼 면목이 없어졌고 죄책감만 잔뜩 부여 안은 채 친정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점점 상황이 악화되었고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동생을 내보내고도 조금도 미안함을 표현하지 않은 남편에게 나는 너무 섭섭했으나 속상해하는 내게 너도 같이 나가라는 막말까지 듣고 나는 아들을 둘러업고 친정으로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고향에는 눈이 펑펑 와 버스가 재를 오르지 못해 미끄러지자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마침 중학교에 다니는 막내 여동생이 학교에서 버스 타고 가는 길이라 나는 아들을 업고 손을 뒤로 모아 아들을 받치고 아버지 드릴 죽 한 상자를 들고 눈 쌓인 재를 넘어 친정 집에 도착했다. 갑자기 친정에 온 나를 본 부모님은 놀라셨고 왜 왔는지 눈치를 챘다. 아버지는 이 추운 날씨에 어떻게 애를 업고 또 무거운 죽을 어떻게 들고 왔느냐며 무척 속상해했다. 당신이 통증과 싸우면서도 자식의 행복이 우선이라며 친정 신경 쓰지 말고 잘살면 된다며 나를 안정시켰지만 엄마는


"나 아니면 네가 고등학교나 나오겠냐? 부모 은혜는 하늘과 같은데 그러는 게 아니다. 너 혼자만 잘살면 그만이냐?"

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야속함보다는 내가 결혼을 일찍 해 친정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현실에 눈물지었다. 또한 직장 다니며 전문대학 다니느라 고향에 큰 도움이 안 되는 바로 밑의 여동생에 대해서도 냉정하다며 원망의 말을 쏟아놓자 아버지는 엄마를 나무라며 왜 애들에게 부담을 주느냐며 당신 능력이 부족하고 아파서 이렇게 된 거지 자식이 잘 사는 모습을 보는 게 아버지는 행복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나는 시부모의 달래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자주 아픈 아버지를 찾아뵈었는데 친정에 들어서면 엄마는 왔느냐는 말도 안 하고 못 본 척 외면했기에 나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들으라는 듯 아버지 암 수술하고 빚도 갚아야 하는데 자식이 있어야 소용없다며 어떻게 뻔히 형편을 알면서 사람을 내쫓을 수 있느냐며 볼 때마다 남동생 내보낸 일을 끄집어냈다. 그럴 때면 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맴돌았다.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서늘했고 나는 오죽 속상하고 답답하면 저런 원망을 쏟아낼까 싶어 엄마에게 섭섭한 마음은 들지 않고 미안함과 죄책감만 잔뜩 끌어안은 채 돌아오는 길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만 쏟아야 했다.


이미 눈앞에 있는 현실임에도 나는 어렸기 때문에 내가 왜 결혼을 일찍 해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불효녀가 되었나라는 생각에만 매몰돼 나 스스로만 책망했다. 아버지가 아프기 전에도 집을 지을 때 '상량식' 한다며 와야 한다고 했고 우린 나름대로 자식 노릇한다고 30년 전 수십만 원을 봉투에 넣어 드렸고 이후에도 싱크대 맞추라며 수십만 원을 드렸으나 엄마에겐 언제나 부족한 듯 보였고 목돈 들어갈 일만 있으면 채무자에게 빚 독촉하듯 지속되었다. 마지막 잔금 수백만 원도 아들 돌반지 팔고 적금 깨어서 마련해 드렸건만 나중에는 받은 적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나도 엄마의 세뇌 같은 말에 어려서부터 길들여져서인지 돈을 주지 못하면 늘 기가 죽고 죄책감이 내 발목을 잡았다.


엄마가 형편이 어려우니 가장 가까운 자식에게 그것도 말만 하면 가진 걸 다 내놓는 내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내게 부담이나 압박으로 작용했다면 일종의 가스라이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의문을 품게 되었다. 나는 마땅히 가족에게 희생하고 봉사해야 하는 사람처럼 인식되었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그렇게 착했던 내가 결혼 후 변했다, 성격이 이상해졌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었다.

keyword
이전 18화남동생의 보호자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