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바라보는 가족들
힘겨운 고향 집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 난 취직했다. 첫 월급을 타 남들처럼 엄마 아버지 내의와 아버지가 갖고 싶어 하는 하모니카와 동생들에게 줄 선물까지 혼자 들고 가지 못할 정도로 많이 사서 고향 집을 찾았다. 용돈도 얼마간 떼어서 드렸는데 월급이 얼마인지 묻는 부모님께 대답했으나 부모님 표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난 바로 재형저축이라는 이자가 많이 나오는 적금을 들었기에 월급을 모두 드리지 못해 좀 섭섭한 것 같았다.
쉬는 날이면 고향 집을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내 손에는 동생들 줄 선물과 먹을거리로 두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가족들에게 뭘 해줘도 아깝지 않았고 그동안 가난에 찌든 부모님께 작게나마 보상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번 돈 중에서 저축만 빼고 고향 집에 모두 쓰고 와도 살림이 나아지기는커녕 제자리였다. 당시엔 냉장고도 없었고, 티브이도 흑백이었고, 전화기도, 가스레인지도, 선풍기도 없었다. 그래서 월급을 탈 때마다 고향에 가면 하나씩 장만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아깝지는 않고 오히려 마음껏 더 해주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내가 벌어서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월급 받아서 단번에 고향 집이 가난에서 벗어나기란 묘연하기만 했다. 직장생활 일 년 후쯤 아버지가 처음으로 당신 명의로 된 논을 장만했다. 바로 집 앞에 있는 논이었는데 땅 모양이 비교적 반듯하고 넓었다. 갑작스러운 논 장만 소식에 무슨 돈으로 샀는지 여쭤보니 농협에서 빌리고 동네 사람에게 사채를 빌린다고 했다. 현금은 일할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기에 모두 빌려서 산다니 걱정부터 되었다. 재형저축 외에 따로 약간씩 저축해 둔 돈을 인출해 땅 값의 1/5를 보탰다.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다. 땅 한 평 없이 오십 평생을 산 아버지가 얼마나 땅을 갖고 싶었는지 이해를 하고도 남았기에 더 보태주지 못해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었다.
땅을 살 때는 좋았지만 절반 이상을 빚으로 산 거니 해마다 이자를 갚고 원금을 갚아나가는 것도 일이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내가 집에만 가면 엄마 아버지는 돈 문제로 다투고는 했다. 집이 그리워 찾아도 마음 편히 쉬었다 오는 게 아니라 겨우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을 정도였는지라 내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건 희망사항에 불과했고 부모님의 말다툼에 안절부절 불안함과 걱정만 가득 안은 채 직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생활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집에 가기 싫어졌다. 부모님은 일부러 경쟁이라도 하는 듯 말 끝마다 돈, 돈, 돈 했기에 직장에 돌아와서도 그 말이 귓전에서 맴돌았다.
집에 갔다가 직장으로 돌아올 때면 다음에는 가지 않아야지 결심했지만 막상 쉬는 날이 되면 갈 곳은 집 밖에 없었다. 늘 무언가를 잔뜩 사서 양손 가득 들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가끔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씀을 듣긴 했지만 부모님으로부터 그 말을 듣는 것 또한 불편하고 거북했다. 한 번은 엄마와 상주 시내로 나와서 선풍기 등 살림살이를 사주고 점심을 사드렸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사드리고 직장으로 돌아오려는데 엄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나 차비 좀 다고."라고 하셨다. 그 말에 허탈함이 밀려왔지만 나는 내 바지주머니에 있는 마지막 돈까지 엄마 차비로 꺼내줬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비참함과 서러움이 밀려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가난과 나만 바라보는 가족에 대한 부담감만 잔뜩 끌어안은 채.
어느 때인가는 회사로 전화가 와 바로 밑의 여동생 수학여행을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수학여행을 가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괜히 기가 죽고 창피해할 여동생이 걱정되어 재형저축 외에 들고 있는 새로 든 적금을 깼다. 여동생이 입을 옷을 한 벌 사고 적금 깬 돈을 부모님께 갖다 드렸다. 동생 수학여행은 꼭 보내라고. 부모님은 초등, 중학교 수학여행 보내줄 때 고등학교는 안 가기로 약속했는데 동생이 억지를 부린다며 나무랐지만 그건 내게 미안해서 한 말씀 같았다. 그 역시도 전혀 아깝지 않았고 수학여행 안 보내줄까 봐 가슴 졸이던 여동생 심정만 가엾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는 또 긴급한 전화가 왔는데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고 마침 그 병원 원무과에 근무했던 친구가 있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며칠 입원해 있던 엄마는 특별한 병명이 없었기에 퇴원했고 그 병원비도 모두 내가 부담했다. 나 외에는 어디에서 돈 나올 구멍이 없다는 부모님 말씀도 있었지만 당연히 내가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처럼 친구들과 놀러 가기로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내 이십 대 초반 또한 나를 위한 건 사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