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사월
삼 연타석 홈런을 쳐도 모자랄 상황에 우리 집은 삼진 아웃을 연타석으로 맞았다. 우리 집에는 우울이 먹구름처럼 덮혀 있어서 웃음기라곤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기우는 해였다. 언니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갯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방바닥을 등지고 누운 엄마는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한 병명도 없이 중환자처럼 자리보전한 엄마 덕분에 살림을 책임지고 엄마를 간호한 것은 물론이고 더 엄청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중 땅을 밭으로 부치다가 소출이 시원찮자 그 밭을 논으로 바꾸는 개간을 시작했다. 땅이 녹으며 불도저를 불러 밭을 두 다랑이의 논으로 밀었는데 그 와중에 남동생이 잘못되고 언니마저 사라진 것이다. 개간하자고 제안하고 추진한 건 엄마였지만 그 뒷감당은 아버지와 내가 했다. 콩, 깨, 고추를 심어 수확해 봐야 목돈이 안 되었기에 고생만 하고 건지는 게 적었는지라 차라리 벼농사가 낫다고 여긴 것이다. 벼농사를 지으면 정부에서 수매를 했기에 밭농사보다는 훨씬 높은 소득을 안겼다.
기계로 큰 작업을 했다고는 해도 논둑을 다듬고 논바닥을 평평하게 다듬는 작업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가뜩이나 언니 가르친다고 진 빚에다 엄마가 일을 하지 못하니 자연히 농사는 알뜰하게 거두지 못했다. 그러니 살림은 더 어려워졌다. 거기다가 논으로 개간하느라 든 장비값도 빚으로 남았기에 따로 사람을 불러 일당을 주며 논을 다듬는 건 무리였다. 아직 뼈도 다 여물지 않은 나를 데리고 일 시키기는 무리였기에 아버지는 한참을 고민하고 혼자 논에 삽질을 하고 오기도 했으나 일에 진척이 없었다.
늘어가는 빚에 농사철이 다가오자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내게 논으로 따라갈 것을 제안했다. 미오골재를 넘어 산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부치는 논이 있었다. 밭이었을 때는 비스듬하게 경사가 졌던 땅이 논으로 개간을 하니 윗 배미와 아랫 배미의 둑 차이가 엄청 컸다. 사람 한 키는 됨직한 논둑은 기계로 대충 모양만 갖추었기에 물이 새지 않게 하려면 논둑을 단단하게 다듬어야 했다. 거기다가 논 바닥도 중간에는 비교적 평평했지만 가쪽으로는 고르지 않아 삽으로 흙을 퍼 다듬는 작업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바소쿠리에 비료포대를 깐 지게를 지고 흙을 져 날랐고 나는 삽으로 흙을 퍼 지게에 올려야 했다. 모 심고, 나락 베고, 김 매기는 해봤지만 삽질은 남자들만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누워있는 엄마 생각에 나는 삽으로 흙을 펐다. 삽날을 땅에 대고 발로 밟아 삽자루 쥔 손에도 힘을 줘 흙을 파야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오전에는 있는 힘껏 삽질을 했지만 한참을 하자 허리는 끊어질 듯하고 손목과 어깨도 시큰거렸다. 삽으로 흙을 퍼는 작업도 고되었지만 뜬 흙을 지게로 올리는 것은 더 힘겨웠다. 물기 묻은 흙인지라 무게가 만만찮았고 나중에는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노동이었다.
코와 입으로는 더운 김이 훅훅 뿜어져 나오고 나중에는 머리까지 띵해졌다. 팔다리가 후덜 거리고 온몸의 통증 때문에 이제 못하겠다는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한 삽 뜰 때마다 이젠 못 한다고 말하자, 힘들다고 말하자 수없이 다짐했지만 입밖으로는 내뱉지 못한 채 해가 져 깜깜할 때까지 삽질은 계속되었다. 한편 종일 삽질을 해 땅을 고르게 해도 별 표시가 없다는 데 또 한 번 절망했다. 삽자루를 쥔 손에는 불에 덴 듯 물집이 잡혔다.
영국 시인 엘리엇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데 생땅으로 파헤쳐진 논은 내게 황무지와 다름없었다. 황무지의 상징성은 다르지만 내게도 사월은 잔인하기만 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을 개간하느라 온몸의 근육통은 물론이고 입술이 부풀었다가 딱지가 앉고 다시 부풀어 올랐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잔인하기만 했다. 해가 져 깜깜해진 길을 터덜터덜 걸어와서 집에 오면 방에는 누워 있는 엄마와 동생들이 눈을 말똥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고단한 몸을 잠시 쉴 사이도 없이 나는 서둘러 저녁을 하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가정실습 기간에 그 황무지를 개간하느라 온통 시간을 다 보내고도 논은 완성되지 못했고 아버지 혼자 삽질하느라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지쳐갔다.
그땐 앞뒤 돌아볼 새도 없이 오직 집안 걱정만 했는데 내가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 나라면 쓰러져 죽을지언정 자식에게 모든 부담을 전가하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깊은 엄마는 아마 화병이 단단히 들었던지 이후에도 연중행사처럼 크게 아프곤 했다. 그럴 때면 위가 다 타서 그렇다고 하거나, 하도 고생을 해 골병이 들어서 아프다는 말을 했지만, 기실 그 골병은 어린 내게 먼저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비만 오려고 하면 몸의 관절 여기저기가 쑤시고 등이 저려 잠들기 어려울 만큼 통증에 시달렸으니 어린 내가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는 함정에 빠진 듯 암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