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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가출

설상가상인 현실

by 글마루

두 해 연달아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는데 거기에 더해 언니가 종적을 감췄다. 남동생의 죽음 이후 가뜩이나 건강을 잃은 엄마는 '마지막 잎새'의 하나 남은 담쟁이잎처럼 위태로웠다. 엎친 데 덮친 격인 현실 앞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꺼져가는 등불이 된 엄마를 보는 것도 내겐 고문이었다. 우리 집에 언제 해가 뜨기라도 할까 싶을 정도로 도무지 진창길을 벗어날 길은 묘연하기만 했다. 거기에 더해 작은 집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언니가 별안간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이 꼬리 물 듯 날아들었다.


마음과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우리 집은 또다시 잿빛 먼지에 뒤덮였다. 다니던 회사에도 온다 간다 기별도 없이 종적을 감추자 수소문하던 작은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그 소식을 알린 것이다. 엄마는 눈물이 마를 새도 없이 다시 눈물 바람이 되었다. 게다가 세상 귀한 맏딸이 아니던가. 아이를 잃은 통곡이 잦아질 즈음 찾아온 소식 앞에 엄마는 이제 통곡보다 자주 훌쩍였다. 서럽게, 너무나도 서럽게 그렇게 엄마의 훌쩍임은 계속되었다. 밥을 먹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티브이를 보다가도 눈물은 수도꼭지 틀어놓은 것처럼 마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자주 울었다. 어쩌면 그 울음으로 인해 엄마를 지탱한 것은 아닌가 여길 정도로 눈물에 의존하는 것처럼 비쳤다. 어릴 때는 나도 너무 속상해 같이 울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으나 눈물도 너무 오래 반복되자 나중에는 무감각해지고 보는 것이 불편했다. 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알 수 없으니 이젠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버린 언니를 향한 사무침은 언니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평소 안 하던 무당을 찾아가 언니의 소식을 물어보고 죽었다는 답이 돌아오면 집에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하는지라 속으로만 걱정하던 아버지가 버린 자식 취급하라는 모진 말을 뱉기도 했다. 겉으로 걱정스러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가 속으로 곪았음은 나중에 드러났다.


자식이 부모의 심정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는 말처럼 나 역시도 언니가 어디에서 살고는 있는지, 왜 집과 소식을 끊었는지 궁금하면서도 원망스러웠다. 겨우 기운을 차리려던 엄마가 다시 자리보전하고 눕자 내 고행과도 같은 고달픔은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졌다. 언니가 학교를 졸업해 돈 벌면 우리 집에 약간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집에 있기보다 밖으로 나다니기 좋아하던 언니에게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소식마저 끊기자 이젠 어쩔 수 없이 공식적인 맏딸 노릇까지 해내야 했다. 엄마가 그토록 속상해하는데 십 년 동안 연락조차 하지 않은 언니를 나는 같은 자매로서 잊기로 했다. 가족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혼자서만 살기 위해 가족과 연을 끊을 리가 없다고 여겼기에.


언니가 사라져 걱정스러운 마음은 늘 마음 한 귀퉁이에서 간질거리듯 괴롭혔지만 그것보다 더한 현실적인 괴로움은 바로 사람들의 시선과 말이었다. 시골에 그것도 같은 성씨 집성촌인 마을에는 언니가 가출했다는 소문이 하룻밤도 안 되어 전염병처럼 퍼졌다. 몇 가구 안 되는 마을에서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그 습성은 알면서도 생각하는 척 캐묻는다는 데 있었다. 소식도 없고 돌아오지 않은 걸 번연히 알면서도 버스 타기 위해 마을 입구로 나가면 마을 어른들이 이구동성으로 묻는 질문에 사람들 마주치기가 싫고 두려웠다.


"너 언니 어디 있냐?"
"몰라요."


레퍼토리처럼 계속되는 지긋지긋한 질문 앞에 나는 사람들이 참 잔인하고 집요하다 여겼다. 남의 불행을 알면서도 일부러 들추는 속내는 무엇인지, 상처 난 살에 소금 뿌리는 것과 같을 정도로 우리 집은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늘 오르내렸다. 아버지가 마음은 좋아도 한 성질 하는지라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던 사람들이 나나 엄마를 만나면 상처 난 속을 더 후벼 파듯 질문을 쏘아댔으니 그걸 견디는 시선이 지긋지긋했다. 그것도 어쩌다가 묻는 게 아닌 겉으로는 걱정하는 듯 속으로는 남의 불행을 즐기나 싶을 만큼 집요한 질문에 언니가 더 원망스러웠다.


게다가 내가 또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을 피하고 다녀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언니의 외상이다. 고2에 올라가고 한 달이나 되었을까. 내가 언니의 동생인 것을 어찌 알았는지 학교 앞 분식집주인의 호출이 있었다. 사 먹을 돈도 없고 아까워서 군것질은 엄두도 못 내던 내가 학교 앞 분식집 아주머니에게 망신을 당했는데 언니가 외상을 크게 했는지라 그걸 갚으라는 요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앞이 노래졌다. 곧바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얼굴이 화끈거렸는데 나는 내가 외상값을 떼어먹은 당사자라도 된 양 죄인처럼 기가 죽으며 겁을 먹었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내게 위협적이지는 않았으나 부모님께 얘기하든지 언니에게 연락해 외상값을 갚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모르게 나는 충격으로 멍했다.


집에 와서 부모님께 그 말씀을 드리자 학생에게 그렇게 큰돈을 외상 준 아주머니도 잘한 게 없다며 이렇다 저렇다 말씀이 없으셨다. 분식집 앞을 지날 때면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도망치듯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돈이 없다는 푸념을 했는지라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며칠 되지도 않아서 또 신발가게 사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신발가게 주인은 친구의 오빠인데 사람 좋아 보이는 그분은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언니가 신발을 외상으로 가져갔다며 갚을 것을 요구했다. 나는 사면초가, 진퇴양난이 바로 나를 두고 나온 고사성어일지도 모른다고 여길 만큼 난처함을 서리처럼 맞은 채 기죽은 죄인이 되었다.


언니와 친한 고종사촌에게 물어봐도 돌아온 대답은 모른다고 했다. 집에는 안 오더라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을 모르는 부모님의 속은 다 타서 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토록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는지 엄마는 살아 있다는 소식이라도 알고 싶어 했지만 십 년 동안 우리 가족은 언니의 그 어떤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자식의 생사를 모르니 어디 한순간인들 마음이 편안했을까.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부모에겐 자식이 세상 전부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안다. 나 역시 그런 가족사를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채 내 가슴에 커다란 멍을 안고 지내야 했다. 언니가 돌아오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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