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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냇동생의 죽음과 엄마의 저주

평생의 죄책감이 되어

by 글마루

얼굴이 유난히 뽀얗고 귀여운 내 동생이 10개월이 채 되기 전 갑자기 아팠다. 분유를 먹으면 토하고 설사를 수십 차례 하며 먹지 못하자 엄마는 병원에 데려갔고 그런데도 동생은 별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계속 아프자 마음이 답답해진 엄마는 큰엄마의 권유로 짚을 삶아 먹이기도 했으나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다급해진 마음에 미신처럼 마당에서 사립 밖으로 칼을 던지기도 했다. 칼 끝이 밖으로 향하면 사람이 낫고 안을 향하면 안 좋다는 미신이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도 태어난 후에도 나는 진정으로 그 아이를 미워하지 않았건만 엄마는 편지 사건 이후 나를 원수 보듯이 했다. 팔밭(산을 개간해 밭으로 만듦)에 고구마를 심으러 갔을 때도 실컷 일하다가 느닷없이 엄마가 나를 확 떠밀기도 했는데 나는 지은 죄가 있는지라 말대꾸도 저항 한마디 못하고 엄마의 화풀이를 다 받아줬다. 친척이건 동네 사람들이건 만나는 사람마다 왜 또 아이를 자꾸 낳느냐고 하니 가뜩이나 환영받지 못하는 출산에 대한 속상함과 서러움을 풀 데가 없었을 것이다. 해서 만만한 게 나였는지도 모른다. 시키는 대로 일하고 말대꾸도 하지 않고 막말과 폭력에도 눈물만 뚝뚝 떨굴 뿐이었기에 나는 엄마의 감정 받이가 되었다.


동생이 설사를 하도 많이 하니 기저귀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천으로 된 기저귀는 잦은 설사로 인해 우린 손 마를 틈이 없도록 기저귀를 빨았다. 기저귀를 불 때고 숯불만 남은 아궁이 위에 얹어 삶기도 했는데 내가 기저귀를 삶고 있을 때 또 엄마의 욕설과 밀침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함에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푹 숙이곤 침묵에 떨었다.


"이년아, 저리 가! 네 년이 싫어해서 애가 아픈 거다. 에이 나쁜 년"


엄마는 기저귀 삶은 대야를 들고 있는 나를 밀쳤다. 그리고는 손도 대지 말라고 했다가 빨리 기저귀 안 빨고 뭐 하느냐며 성화였다. 나는 엄마의 눈치만 살피며 로봇처럼 움직여야만 했다. 엄마가 구박한다는 걸 인지했지만 아픈 자식을 둔 엄마의 심정이 얼마나 속상할지 짐작이 갔고 나 또한 동생이 아픈 게 몹시 걱정되었다. 엄마는 우리가 동생 낳는 걸 반대해서 애가 아프다며 악다구니를 쳤지만 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동생이 빨리 낫기만 바랐다. 진심은 나도 동생을 사랑하고 귀해했다.


여러 날 아이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엄마가 상주 시내에 있는 종합병원에 입원시켰다. 고2 올라가던 2월 봄방학 때였는데 서울에 취업해 작은집에서 출퇴근하던 언니는 몇 달째 소식이 묘연했다. 아버지는 남아있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기에 엄마가 내게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걱정으로 두근거림을 안은 채 난생처음으로 병원이라는 곳을 갔다. 소아과 주치의가 청진기를 동생의 배에 대고 검사를 하고 장염 같다며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병실에 입원해 링거 주사 바늘이 들어갈 때 자지러들 듯 울던 동생은 생기가 돌았다.


동생이 아픈 것과는 무관하게 엄마와 나는 거의 굶다시피 했다. 다음날 너무 굶어 기운이 없자 엄마가 라면을 사서 끓여 먹으라며 돈을 줘서 라면을 몇 봉지 사서 끓였다. 병원 구석에 있는 취사기구가 있는 곳에서 나는 라면을 삶았고 병실로 가져와 먹고 있을 무렵 갑자기 엄마가 비명 섞인 울음을 터뜨렸다.


"아가, 아가!"


나는 라면을 먹다 말고 동생을 들여다봤고 동생은 무엇이 괴로운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가 빨리 의사를 불러오라는 송곳 같은 외침에 나는 간호사에게 달려가 동생의 상태를 알렸다. 주치의가 달려와 아이를 체크했다. 울부짖는 엄마를 병원 관계자가 나무라듯 진정시키고 의사는 내게 따라오라고 했다. 엄마가 너무 흥분한 상태라 대화를 할 수 없다며.


주치의는 아기의 X-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내게 학생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1이라고 대답했고 주치의는 사진상으로는 병명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큰 질환이 있는 것이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일단 지켜보자고 했다. 며칠이나 있었을까. 나는 잿빛 같은 병원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엄마의 심부름을 했고 같이 아기를 돌봤다. 엄마나 나나 하루에 한 끼도 겨우 먹으며 동생이 빨리 나아 집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병원에 왔는데 설마 낫겠지 라는 기대를 걸며.


그런데 동생이 별 차도가 없자 엄마의 신경질은 극에 달했다. 너무 배가 고파 쥐어짜는 통증에 배가 고프다고 하자 네 동생이 아픈데 밥이 넘어가냐며 내게 화를 퍼부었다. 엄마의 성난 파도 같은 화풀이도 배고픔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너무 기운이 없어서 쓰러질 것 같다고 하자 라면 살 돈을 줬고 라면을 끓여서 먹으려는 찰나 이번에는 엄마의 외마디 절규가 쏟아졌다. 라면을 먹다 말고 나는 동생을 살폈는데 동생은 눈을 감은 채 힘겨운 고개를 넘듯 숨을 들썩였다.


나는 부리나케 간호사를 부르고 간호사의 다급한 요청에 주치의와 병원 관계자 몇이 병실로 들어섰다. 그들은 웬 기계를 들고 와 플러그에 전원을 연결했는데 거기에서는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기는 자는 듯 고요했다. 나는 그 기계가 아기에게 마지막 치료제라 여기며 아기가 깨어나길 기대했다. 곧이어 병원 관계자들이 모두 떠나고 엄마와 나는 그 기계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사실 그 기계는 치료장치가 아니라 '가습기'라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 알았다. 순한 동생은 아픈 데도 크게 울지도 않았고 새근새근 옅은 숨소리만 들렸다.


그러다가 이내 그 옅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울고불고 통곡하며 병실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주치의가 동생의 사망 소식을 알렸고 나는 공중전화로 아버지께 알렸다. 전화가 없어 사촌오빠 집에 전화를 걸었고 평소 괄괄한 성격의 사촌오빠는 소식을 듣자 울먹였다. 아기를 영안실에 안치한다고 했다. 엄마는 아기를 데려오라고 울부짖었다. 나는 병원 복도를 뛰어다니며 영안실을 찾았고 반은 정신이 나간 상태로 아기를 찾아다녔다. 결국 병원에서는 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응급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로비를 통해 밖으로 나오는데 엄마가 아기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더니 병실 로비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엄마를 부축했으나 나 또한 심장이 멎는 듯하고 다리가 후덜거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병원에서 죽지도 않은 아이를 죽었다고 거짓말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엄마가 악을 쓰며 울부짖자 로비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쏠렸다. 그 시선은 깨진 유리조각 파편들이 나를 향해 화살처럼 마구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길지 않은 시간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진정되지 않은 엄마를 끌어안고 차를 탔다. 이불에 싸인 아기는 얼굴만 차갑고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아기는 건넌방으로 옮겨졌고 엄마는 통곡에도 지쳤는지 쓰러지듯 방바닥에 누웠다. 아버지는 엄마처럼 통곡하진 않았지만 자식 잃은 슬픔을 목구멍으로 삼키는지 목울대만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잠든 것 같은 동생의 뺨에 얼굴을 대보고 몸을 만졌는데 아직도 따뜻하기에 아버지께 죽은 게 아니라 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했는데 아버지는 안 된다고 했다. 동생의 몸만 온기가 남았을 뿐 몸은 이미 쫙 펴져 움직임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기를 어떻게 할지 엄마에게 물었고 엄마는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라고 했다. 아버지는 지게에 아이를 얹고 사람들이 잠든 밤에 혼자 묻고 돌아왔다. 엄마에게는 땅이 좋은 곳에 묻어줬다는 말을 하는데 자기 자식을 직접 땅에 묻은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두고두고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생이 떠나고 난 후 아버지는 동생이 타던 보행기며 옷가지며 젖병이며 모두 태워버렸고 근 일 년 만에 큰일을 두 번이나 치른 엄마는 아예 자리보전하고 누웠다. 한참을 밤이 깊어지면 죽은 자식을 찾는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고 그걸 듣는 우리 가족도 같이 통곡했음은 물론이다. 동생이 죽은 것도 우리에겐 큰 충격이었지만 한 서린 엄마의 울음은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는 것을 반대해 그걸 안 동생이 일찍 세상을 떠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니 무서웠다. 아기의 원혼이 나를 따라다닐 것만 같은 두려움은 오래도록 트라우마로 남았다. 죄책감과 더불어.


엄마 또한 아기를 보내고 아버지께 우리의 편지 사건을 털어놓으며 저 못된 년들 때문에 아들이 죽은 거라며 우리 탓을 했다. 동생과 나는 죄인이 되어 눈물만 뚝뚝 떨구었다. 엄마는 악에 받쳐 우리에게


"어디 네 년들 나중에 새끼 낳으면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자!"

라는 악담을 퍼부었는데 아버지는 애들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며 엄마를 말렸다. 철없는 아이들이 뭘 알겠냐며 설마 얘들이 동생 잘못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로 엄마를 달랬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별다른 꾸중을 하지 않고 엄마에게 잘못했다고 빌라는 말만 남기고는 방을 나갔다.


이후 엄마는 거의 자리보전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가끔 기운이 괜찮을 때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내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흔들기도 했는데 그때 엄마는 아마도 정신이 많이 쇠약해졌던 것 같다. 억울하게 멱살잡이를 당하고도 나는 어떤 말이나 저항조차 하지 못했고 그렇게 죄인처럼 엄마의 화풀이를 받으며 농사꾼이자 부엌데기가 되었다. 그저 엄마가 가여울 뿐 우리 집은 불씨가 다 꺼져가는 재처럼 회색의 기운만 맴돌았다.


당시 나의 의식에는 죄책감이 온통 사로잡았다. 밤이 되면 아기의 영혼이 찾아오는 것 같았고 자기가 태어난 걸 반대한 우리에게 벌을 줄 것 같았다. 동생에 대한 죄책감은 엄청난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게 했는데 나는 나중에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죽은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얼마나 반복하며 빌었는지 모른다. 동생의 마지막 모습은 오래도록 내 뇌리에 남아 수십 년을 미안함과 죄책감에 떨게 했다. 우리가 태어나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괴롭고 무서웠다. 작은 내 어깨엔 운명의 짐이 산처럼 내리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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