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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발이 슬프다

억울함과 죄책감의 중간

by 글마루

어떤 연유에선지 엄마는 자주 아팠다. 숫제 드러누웠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내가 중학생이 될 무렵부터 몇 년을 시름시름 앓았기에 나는 얼떨결에 집안 살림을 모두 도맡다시피 했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우리 집은 그 흔한 전기밥솥이 없어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밥을 했다. 살림만 하는 것은 그나마 양반 축에 속한다. 자리보전하고 누운 엄마 대신에 학교가 쉬는 날이면 여지없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들일을 해야 했기에 고된 농사일로 입술이 부르트기가 다반사였다.


우리 집은 그 마을에서도 가장 가난한 축에 속했다. 아버지 명의로 된 땅이 한 평도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하기도 했으나 공납금을 면제받으면서 가난에 대한 의식이 확고하게 각인이 되었다. 아프기 전 엄마는 날품팔이를 자주 다녔다. 나보다 두 살 위에 언니가 있었는데, 맏딸에 대한 엄마의 기대는 상당했다. 늘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나나 동생과는 다른 대접을 해줬기에 우리 둘의 상대적 박탈감은 성인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기대했던 맏딸은 엄마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렸다. 이래저래 화병이 든 엄마가 자리보전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원인 모를 병 때문에 몸은 시름시름 아프고 돈은 없고 그러니 한 마을 친척 아주머니가 닭발을 사서 고라고 했다. 다행히 닭발 푹 곤 국물을 드시고 엄마는 약간의 차도가 있었다. 친척 아주머니는 우리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해 닭발을 살 일을 주선해주었는데 포도밭 작업이었다. 엄마가 아프니 내가 보호자가 돼야 한다기에 나는 엄마와 포도밭으로 일하러 갔다. 하루 일하면 엄마가 일주일은 드실 닭발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포도밭을 밭째 사서 장마다 다니며 파는 중간상인의 트럭을 타고 아주머니들과 포도밭으로 갔다.


모를 심거나 나락을 베고 김을 매는 일은 해 보았으나 포도밭 일은 내게 처음이었다. 이것저것 시켜 봐도 일하는 것이 시원찮으니 주인아주머니가 내게 포도 나르는 작업을 시켰다. 아주머니들이 플라스틱 바구니와 양동이에 따놓은 포도를 손질하는 작업장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엄마는 앉아서 포도를 손질하고 그런 기술이 없는 나는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종일을 날랐다. 처음에는 그럭저럭할만하던 일은 오전을 넘기면서 고비가 찾아왔다. 그렇다고 중간에서 그만두면 일당도 받을 수 없으니 멈출 수도 없었다.


포도밭은 망과 골 사이에 높낮이가 있어 다니기가 불편한데다 포도나무가 낮게 있어 허리를 구부리고 운반 작업을 해야 했다. 다리는 점점 당기고, 허리를 굽혀서 나르니 허리가 뻐근한 것은 물론이고 무거운 것을 계속 반복해서 날랐기에 손목이며 팔이며 저리고 욱신거렸다. 엄마 역시 몸이 성치 않은지라 포도를 손질하며 힘겨워하는 나를 안타까운 듯 바라봤다. 혹시 주인이 일 못한다고 돌아가라고 하는 건 아닐까 조바심하는 게 내 눈에도 비쳤다. 덩달아 나까지 주인 눈치를 봐야 했다.


그날은 어떻게 일을 마쳤는지 모른다. 다행히 주인아저씨가 내 일당을 챙겨줬다. 나는 하루 품삯 모두를 엄마에게 드렸다. 너무나 곤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와서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쓰러지다시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온몸이 뻐근함을 느끼며 일어났고 코뚜레 꿰인 소처럼 또다시 엄마와 함께 그 포도밭으로 향했다. 그러기 전 트럭을 기다리는데 마침 같은 학년 남학생이 우리 마을을 지나다 아주머니들과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걔는 나를 무척이나 반겼지만 나는 품팔이 하는 게 들통날까 봐 숨고 싶었다. 젤리처럼 물렁한 내 자존심이 뭉개지는 게 싫은 걸 눈치챘는지 트럭은 일꾼들을 태우고 포도밭으로 달렸다.


어제의 그 포도밭으로 가 나머지 작업을 해야 했다. 산 밑에 자리 잡은 포도밭은 잘 익은 포도보다 덜 익어 푸르딩딩한 송이가 많았다. 주인아주머니는 그런 포도도 잘 팔아치운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트럭에 포도를 가득 싣고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왜 포도가 시퍼러냐고 묻는다고 했다. 그러면 원래 포도 색깔이 그런 종자라고 둘러댄다며 나중에는 시장바닥에서 “반포도 사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포도를 다 팔았다며 자신만만했다. 포도 손질하는 아주머니들은 그 말에 장사수완이 좋다며 깔깔깔 웃어댔다.


가을이지만 한낮은 무척 더웠다. 포도나무 아래라지만 햇빛이 비쳐 그 밑을 무거운 것을 들고 오가기가 힘들어 나중에는 바구니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날랐다. 주인아주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게 바짝 들고 나르라고 했지만, 어린 학생이 일하는 게 안 돼 보였던지 주인아저씨는 성큼성큼 바구니 몇 개를 손쉽게 들어 날랐다. 포도를 다 모으고도 나는 허드레 심부름이나 해야 했고 그러는 사이 작업도 일찍 끝났다.


주인아저씨는 학생이 고생했다며 내게 직접 하루치 일당을 내밀었다. 나는 내 몫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쭈뼛거리며 돈을 받았다. 그날은 너무 힘들게 일한 나머지 엄마에게 받은 돈을 전부 드리지 않았다. 전날 이미 하루 일당을 다 드렸기 때문에 낡아서 구멍이 뚫린 메리야스가 생각났기에 그걸 사고 싶었다. 어쩌면 그 시기 소녀에게 속옷은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느 집은 엄마가 이모저모 세심하게 챙겨줬지만 엄마는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그 일 때문에 사달이 났다. 엄마가 친척 아주머니께 내가 번 돈을 주지 않았다고 고자질하는 바람에 그 아주머니께 나는 아주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아픈 엄마 닭발 사주지 않고 메리야스 사 입을 돈이 어디 있느냐며 마치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몰아세웠다. 나는 억울하기도 했지만 메리야스 살 돈만 남기고 나머지는 엄마에게 드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섭섭한 마음에 네가 번 돈이라고 네 마음대로 쓰느냐고 했지만 야속하기는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새 메리야스 두 장을 사고 그 원망을 두고두고 들었던 것 같다.


발톱도 빼지 않은 닭발을 면 소재지에서 직접 사서는 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집에 갔다, 닭발 껍질을 벗기고 발톱을 빼고 깨끗이 씻어서는 푹 고아서 엄마에게 드렸다. 닭발 곤 국물을 드신 엄마는 차차 몸이 좋아지는 듯했다. 나는 특별히 사춘기라는 것을 겪진 않았는데 중학교 3학년 여학생에게는 엄마 아픈 것만큼 속옷도 중요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아픈 엄마께 돈을 다 드리지 못한 걸 반은 죄책감으로 반은 억울함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게 부끄럽고 민망해 지금껏 마음속으로만 간직했었는데 그 일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이젠 안다. 혼자 남몰래 죄책감을 안고 살아온 내가 가여울 때가 있다. 엄마도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어린 내게 의지했을까. 당시 엄마에게 나는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였을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내내 시든 상추처럼 누워있던 엄마를 생각하면 왠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부터 솟구친다. 그래서 아무리 농사일이 힘들어도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꾸역꾸역해냈던 것 같다.


그때의 힘겨움이 디딤돌이 되어 이후에는 쓰나미 같은 힘듦과 어려움도 잘 견뎌냈다. 다행스럽게도 당신이 마흔도 못 넘길 것 같다던 엄마는 이제 여든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의 나는 돌이켜보면 엄마의 병환과 지독한 가난이라는 무시무시한 파도에 휩쓸렸던 건 아닌지. 이젠 그때의 어린 소녀에게 괜찮다고, 그만하면 잘했다고 토닥토닥 어루만져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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