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차별의 정당화
나는 집안의 둘째 딸이다. 위로 맏이인 언니는 태어날 때부터 서열이 첫째라는 이유로 엄마에겐 세상 누구보다 귀한 딸이었다. 첫 딸은 살림밑천이니까, 맏이라서, 맏이니까, 맏이이기에 늘 언니는 귀한 존재였다. 같은 자식인데도 좋은 옷, 좋은 음식은 늘 언니의 차지였고 너무 당연시하는 엄마 때문에 우리도 그런 줄 알고 자랐다. 수학여행 가서 사 온 쥐포를 나는 아까워 먹지도 않았는데 맛도 보지 못한 채 당시 대구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언니 줘야 한다며 찬장에 넣었고 나 역시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섭섭하고 서러울 때가 있었다. 같은 자식인데 엄마가 언니만 챙길 때였다.
언니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엄마가 언니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없는 형편에 대구까지 유학 보내려면 공납금이나 생활비 등 적잖이 비용이 들었는데 성적도 좋지 않은 언니를 대구의 변두리 사립 여상에 보낸 것이다. 그리고는 당시 막내였던 세 살배기 여동생을 업고 들기름을 짜고 떡을 해서 대구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언니가 대구에 있는 고모집 방 한 칸을 얻어 한마을 친구와 자취를 한 것이다. 아이를 업고 그 무거운 보따리를 들었는데도 엄마는 전혀 힘겨운 내색이 없었다. 오히려 들떠 보였다.
언니가 공부라도 열심히 했으면 엄마가 보따리 보따리 싸서 대구에 수시로 다녀온 보람이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언니는 공부보다는 멋을 부리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다. 수시로 생활비를 보내줘야 했는데 그때는 계좌로 송금하는 제도가 없었을 때인지라 우체국에서 소액환으로 교환해서 우편으로 발송하면 소액환을 현금으로 바꿔서 쓰는 방식이었다. 나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1교시가 끝나면 우체국으로 달려가 언니에게 소액환을 보내고는 했다. 쉬는 시간에 다녀오려면 시간이 부족해서 선생님께 혼나지 않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고 다녀와야 했는데 너무 자주 그런 심부름을 하는 데다 급하게 달음박질하는 게 힘겨웠다.
게다가 그 당시 거금에 속하는 몇만 원씩 돈을 만지는 자체가 내게는 부담이었다. 자칫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혹시라도 실수해서 소액환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까 하는 걱정으로 편하지 않았다. 헐레벌떡 뛰어가서 소액환을 보내고 나면 얼마 안 있어 돈이 떨어졌다는 연락이 왔기에 엄마는 없는 돈을 구하러 남의 집에 돈을 빌리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언니가 집에라도 다녀가는 날이면 엄마는 여느 때보다 들뜬 표정으로 언니에게 먹일 음식을 장만하고는 했다. '언니 줘야 한다.'는 말이 귓전에서 맴돌 정도로 엄마에게 언니는 특별히 귀한 존재였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언니를 안고 "정경부인 될래, 숙부인 될래."라고 말씀하셨다면서 우리 집 환경이나 언니의 성적은 고려하지 않고 어떤 허황된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딸 여섯에 아들 하나 있는 고모 집에는 언니와 나이가 같은 사촌이 있었는데 둘은 마음이 맞아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남자친구들과 어울리며 학교까지 빼먹었다. 당시 대학교 서무과에 과장으로 근무했던 고모부는 매우 점잖고 학식이 깊었는데 당신의 딸과 질녀가 밖으로만 배회하고 급기야 가출까지 하는 바람에 비행 청소년들의 아지트를 찾아다니느라 속을 많이 태우셨다. 그 점잖은 분이 나중에는 말리다 안 되니 딸자식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도 했다는데 그럼에도 그녀들은 거리를 바람처럼 헤매었다.
장기결석으로 퇴학 위기에 처하자 고모부의 학연의 도움과 엄마가 여동생을 등에 업고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울며불며 통사정한 끝에 시골 학교에 전학 오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언니는 대구에서 시골로 전학 왔다. 시골에 오면 같이 어울릴 사촌이 없으니 좀 조용하겠거니 했는데 여전히 주말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때문에 나는 혼자 엄마를 따라다니며 들일을 했고 집안일을 도맡았다. 언니는 어쩌다 가끔 밭에 같이 가서 잠깐 김을 매는 정도였는데 엄마는 그런 언니가 후딱후딱 일 잘한다고 칭찬하며 손이 느린 나와 비교하고는 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편도 10km 거리의 고등학교에 다녔다. 버스비로 엄마가 만 원을 주고 거스름돈 받아서 둘이 나누라고 했는데 거스름돈을 달라는 내게 언니는 버스에서 내리면 준다고 했고, 내려서 달라고 하면 교실에 찾아오라고 했다. 쉬는 시간에 가면 수업 마치고 오라고 했고, 수업 마치고 가보면 일찍 사라지고 없었기에 나는 집에 돌아올 버스비가 없어 친구에게 빌려야 했다. 집에 와서 그런 일을 이야기하면 엄마는 언니를 꾸짖어야 함에도 왜 바로 돈을 받지 않았냐고 도리어 나를 나무랐다.
언니의 얌체 짓은 계속되었고 나는 차비가 없어 창피함을 무릅쓰고 친구들에게 차비를 빌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만 원짜리 지폐를 내게 맡기면 내가 공평하게 나누련만 언니가 매번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는 언니에게 돈을 줬다. 또한 언니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돈을 빌려서라도 사주었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같이 주는 게 아니라 따로 숨겨서 언니 줘야 한다며 여동생과 나는 맛도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 일은 여동생에게도 한으로 남아 지금도 엄마는 먹는 것까지 큰언니와 차별했다며 섭섭해한다.
엄마의 독특한 사랑법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정해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집안에 할 일이 있으면 부르는 자식은 나였고 먹을 게 있으면 언니에게 택배로 바리바리 싸 보내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기라도 하면 엄마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너는 왜 생각하는 게 그렇냐? 그러려고 왔냐? 동네 사람들 알까 창피하다."라고 하며 내가 죄책감을 갖도록 했기에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늘 말 끝에 "부모에게 그러는 것 아니다. 언니가 어려우면 네가 도와야지."라며 비난했기에 어려서부터 엄마의 말이 진리라고 여겼던 나는 속상함만 가득 안은 채 도무지 엄마 마음에는 내가 자식으로 존재하긴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