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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잔소리

빨리빨리가 주는 효과

by 글마루 Mar 31. 2025

  현재의 나를 아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나보고 성격이 급하다고 한다. 남들보다 걸음이 빨라 때로 너무 빠르다는 소리를 듣기도 할 정도로 나는 어느새 빨리 걷는 사람이 되었다. 말도 언제부터인지 빨라서 천천히 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습관으로 굳어진 게 완전히 고치기는 어렵다. 살아보니 아무리 급해도 거쳐야 할 과정이 있고 아무리 빨리 하려고 해도 순서라는 게 있어서 서두른다고 남보다 더 빨리 목적을 달성하지는 않는다.


  언니는 맏이인 데다 모유가 부족하지 않았는데도 우유를 사 먹여서 덩치가 크고 건강했다. 나와 바로 밑에 여동생은 엄마가 몸이 좋지 않을 때 낳기도 했지만 젖이 부족해서 쌀가루도 아닌 보리밥 끓인 물을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몸이 마르고 허약했다. 바로 밑의 여동생은 나보다도 키가 작아서 평생 콤플렉스였다. 어릴 때 하도 작아서 동네 사람들이 '창경원(동물원)'에 데려다 놔야겠다는 말을 했다는데 어른들이 무심코 했던 그 말이 여동생에게는 두고두고 상처가 되었다.


  젖배를 많이 곯아서인지 나는 항상 기운이 없었던 것 같은데 엄마, 언니와 어디를 걸어갈 일이 있으면 내 걸음이 더디니 빨리 오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달고 살았다. 게다가 나는 길 옆에 피어나는 풀과 꽃, 잠자리 등 자연물에 관심이 많아 무엇이든 그냥 보는 법이 없이 유심히 관찰하는 성향이 있는지라 해찰하다 보니 뒤처졌다. 지금도 어렴풋하게 빨리 오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정도로 잔소리를 들었다. 걸음이 느려서인지 장에 갈 때도 엄마는 나는 데려가려고 하지 않고 언니만 데려갈 때가 많았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서는 무슨 원인인지 아침에 코피를 펑펑 쏟고 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학교로 가려면 '미오골재'라는 작은 재를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다. 코피가 펑펑 쏟아져 아버지가 코를 뒤로 젖히고 나는 울고 있었고 그 모습을 한마을 쌍둥이가 지나가면서 지켜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뿐 아니라 유년시절 나는 자다가도 코피가 흐르고 잠결에 코피가 코 뒤를 타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코피를 흘리면 역한 피비린내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먹는 게 부실하고 늘 기운이 없어 쓰러질 것 같은데도 나는 용케 한 번도 기절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힘이 없으니 걸음걸이도 느릿느릿하고 달리기도 못했다. 아마도 빈혈이 심했던지 겨우겨우 움직였던 것 같다. 몸에 힘이 없으니 엄마가 심부름을 시켜도 빨리 못 다녀왔다. 그러다 보니 레퍼토리처럼 듣는 말이 있었으니


  "사흘에 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사람 같다, 거 죽어 빠졌다(지금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지만 기운이 없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같음), 팔십 먹은 노인 같다."


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실제로 나는 기운이 없었고 걸어 다니면 꼭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또한 방바닥에 반듯하게 누우면 허리를 삔 것 같은 통증에 바로 눕기도 힘들었고 척추가 어긋난 것처럼 꼼짝 못 할 때가 많았다. 계속해서 그런 증상이 있자 엄마에게 허리가 아프다고 말했고 엄마는 어린 게 왜 허리가 아프냐는 말로 일축했지만 허리 마디가 삐끗거리는 증상은 꽤 오래갔다.


  5학년 이후부터 엄마를 따라 밭에 일하러 갔을 때 언니는 기운차게 설렁설렁 잘하는데 나는 풀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뽑으니 답답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답답하다, 느려터졌다'라는 말을 하도 들으니 나중에는 오기가 생겨서 죽기 살기로 일한 적이 있다. 잔소리를 듣기 싫어 힘껏 일하다 보니 밭을 매는 것에도 요령이 생겨서 나중에는 제법 농사꾼처럼 한몫을 하게 되었다. 거의 나만 엄마 따라 밭에 일하러 가니 동네 아주머니가 근처에 일하러 와서는 왜 나만 일을 시키는지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야는 안 시켜도 지가 도와주겠다고 따라나서네요."라고 말하자 먼 친척 되는 아주머니가 "어려서 일 너무 많이 하면 팔자 되는데……."라며 걱정스러운 말을 했다. 내가 성인이 된 후 삶이 힘겨울 때면 그 말이 상기되곤 했다. 솔직히 일하는 게 좋은 아이(사람)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힘들었지만 싫다고 하면 혼날까 두려웠고 한편 어떻게든 집안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하기 싫다거나 힘들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것이다. 농사일은 매우 고되었는데 곧 숨이 넘어갈 듯 힘겨울 때면 멍에를 걸머진 소처럼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아침에 일을 시작하면 해 질 녘만 기다렸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면 감옥을 빠져나온 탈옥수처럼 해방감을 느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에도 엄마는 나를 앞장 세워 밭으로 향했는데 들깻모를 서너 포기씩 모아서 엄마에게 건네줘야 했다. 들깨는 윗부분의 키를 맞춰 집어주면 엄마가 밭에 들깻모를 눕혀서 심었다. 비가 온 후나 비가 올 때 심어야 들깨가 잘 살아났기 때문인데 그렇게 종일 비를 다 맞고 깻모를 집어주면서도 다 마치고 난 후에 수고했다는 인사를 못 들었다. 어린아이가 성인처럼 들일을 해낼 수 없는 게 당연한데도 나는 일하면서 그것밖에 못하냐는 핀잔을 많이 들었기에 나중에는 나 스스로를 격하시키고 뭘 해도 자신이 없었다.


  일을 할 때는 귀가 아프도록 잔소리를 들었는데 정작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엄마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를 칭찬했다. 안 시켜도 스스로 부모를 도와 일하는 효녀라고. 어쩌면 그 '효녀'라는 말이 나를 평생 옭아매는 단어가 되었는지 모른다. '효녀'라는 꼬리표도 있었지만 엄마가 효녀라고 한 것이 틀리지는 않았다. 나는 엄마가 일할 때면 늘 따라가서 같이 일했고 아파서 누워 있을 때면 죽을 끓여드리든지, 어설프지만 한약을 달여서 삼베조각에 숟가락 두 개로 비틀어 짜 엄마에게 드렸다. 내 인생에는 오직 엄마밖에 없었다. 이유는 엄마가 아파서 돌아가실까 봐 늘 불안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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