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 콤플렉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나 어른들로부터 차분하다는 소리를 듣고 성장했다. 밖으로 쏘다니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를 하기보다 학교 갔다 오면 숙제부터 해놓고 달랑 두 권밖에 없는 동화책을 몇 번이나 읽기도 하고 읽을 책이 없으면 교과서의 이야기가 궁금해 몇 번씩 읽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훗날 아버지와 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국어 교과서 한 권을 통째로 술술 외웠다고 한다. 그만큼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기를 좋아했다.
예전에 교과서 내용이나 선생님 말씀도 애국, 효도, 반공이 모토였기에 나는 교과서나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며 따랐다. 한마디로 나는 교과서적인 유형이었다. 그랬기에 부모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여겼으며 농사짓느라 바쁜 부모님을 돕고자 초등 5학년 무렵부터 스스로 무를 채 썰어 생채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는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옷을 개고 방을 청소하고 정리하느라 나름 바빴다.
엄마가 시집와서 큰엄마로부터 시집살이하고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 고생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 나는 엄마가 너무 고생만 한 것 같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든 엄마를 돕고 편하게 해 주고자 골몰했다. 엄마의 고생을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에 내 관심은 어떻게 하면 엄마를 도울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책 읽는 것 외에 놀이에 소질이 없으니 적극적으로 놀이에 끼어들지 못했고 주변머리에서 어물쩍거리다가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다른 아이들이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오재미 던지기, 공기놀이 등으로 소일할 때 나는 엄마의 심부름을 많이 했다.
한마을에 외동딸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의 집에 놀러 가면 담배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도와 담배 엮는 일을 하고 있었다. 5학년밖에 되지 않은 그녀는 반복되는 작업으로 인해 능숙하게 담뱃잎을 엮었고 그 모습이 신기한 나는 따라 해 봤지만 그녀만큼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농사일을 돕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아버지의 만류를 무릅쓰고 농사일하는 부모님 옆에서 일을 거들겠다고 나섰다. 아버지는 집에 가라고 했지만 밭에 비닐을 씌우는 작업을 기어이 끼어들어 거들었다. 생각해 보면 무엇이든 호기심이 많은 나는 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콩타작한다고 개롱기(밟로 밟아 돌아가는 탈곡기로 개롱개롱 소리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반자동 기계)를 밟을 때면 내 발을 한 짝 올리고 끼어들었으니 뭐든 해보고 싶어 하는 내 성향도 노동으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5학년 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투입되었는데 모심기부터 했다. 내가 하기 싫다고 했으면 부모님도 구태여 시키지 않았을 텐데 나는 뭐든 돕고 싶은 마음으로 거절하지 않고 부모님을 따라 논으로 향했다. 모내기는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아주 중대사 한 일이었다. 지금은 규격화된 플라스틱 모판에 볍씨를 사나흘 촉을 키워 흙을 덮어 논에 못자리판을 만들어서 모를 키우지만 예전에는 이런 모판이 없었다.
사나흘 물에 불린 볍씨를 쟁기질로 논을 갈고, 쓰레질로 논을 삶아서 다듬어놓은 못자리에 볍씨를 뿌리고 한 달 가까이 모를 키웠다. 못자리에 초록초록한 모가 빽빽이 10cm가량 자라나면 모내기를 하기에 앞서서 모를 쪄는 작업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개흙으로 물이 정강이 중간쯤 차 있는 논에서 앉은 모양새를 하고 엉거주춤 모를 찌는 작업을 먼저 했다. 한 춤을 쪄서 볏짚으로 묶어 모아 놓으면 그걸 또 운반해서 모 심을 논으로 옮겨야 했다.
모내기하는 날은 있는 집이나, 없는 집이나 반 잔칫집 분위기가 제법 났다. 일꾼에게 줄 점심을 그날만큼은 푸짐하게 준비했기에 여느 때와는 달리 맛있는 반찬이 많았고 근처 논에서 일하는 이웃들과 점심이나 새참을 나누어 먹었다. 한 마을 주민들끼리 품앗이로 모심기를 해주거나 품삯을 받고 날품팔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찌기가 끝나면 모춤을 모심기할 논에 적당히 군데군데 막 던져 놓는다. 논배미가 크지 않는 논이라도 최소 못줄 잡는 사람 기본 두 명, 심는 사람 4~5명은 있어야지 모심기가 가능했다. 초록색 못줄에는 빨간색 눈금이 거의 10cm 간격으로 나 있고 폭은 거의 20cm 됨직했다. 일꾼들이 서로 호흡을 맞춰서 심어야 모심기를 빨리 많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놉을 얻지 않고 모두 가족들이 해야 했다. 부모님이 양쪽에서 못줄을 잡으며 모를 심고 그 중간에서 우리가 모를 심었다. 모를 서너 포기씩 떼어내 물렁물렁한 땅에 꽂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감을 못 잡아 너무 깊이 꽂아 모가 물에 잠겨 보이지 않기도 했고 어설프게 꽂으면 모가 땅 속에 정착하지 않고 물에 둥둥 떠다녔기에 모를 심는 것도 감각이 필요했다. 부모님을 돕고 싶은 마음과 호기심 반으로 시작한 모심기는 쉬운 게 아니었다. 허리를 굽혀 모를 심고 다시 펴고 반복되는 작업으로 허리는 끊어질 듯했다. 해거름 무렵 엄마는 나를 먼저 보내며 집으로 가 저녁을 하라고 했다. 나는 농사일에 지쳤음에도 가족들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준비했다.
부모님을 위하는 마음 반, 호기심 반으로 시작한 농사일이 한 번 발을 들여놓은 후로 나는 충직한 일꾼으로 전락했다. 점점 내가 감당해야 할 농사일은 늘어갔고 중학생이 되면서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내게 호밋자루를 건네며 따라오라는 엄마의 요구로 쉴 틈이 없었다. 잘 먹지 못하고 아직 어린 내가 엄마만큼 하지 못하자 엄마는 직접 시범을 보이며 따라 할 것을 요구했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엄마만큼 풀 뽑는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엄마의 잔소리와 핀잔을 들으며 캄캄할 때까지 밭을 매다가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하거나 설거지를 도맡기도 했다. 밖으로 쏘다니기 좋아하는 언니는 갖은 핑계를 대며 농사일에서 나처럼 동원되지 않았는데 나는 요령을 피우거나 거짓말을 못할 정도로 주변머리가 없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들에 나가지 못하니 집안에서 빨래나 설거지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나중에는 비가 오면 반갑기까지 했다.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거나 호미로 땅을 파서 옥수수나 콩을 심기도 했다. 종일 쪼그리고 하는 작업은 나중엔 무릎도 뻣뻣하고 계속되는 호미질에 어깨와 팔은 근육통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다. 가정실습(현재의 재량휴업)이 있는 날은 며칠씩 모를 심었기에 팔다리가 아픈 건 기본이고 너무 고된 노동으로 인해 입술이 부풀어 터진 적도 있었다.
그땐 농촌에서 자라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농사일에 동원되었으며 언제부터 시작하는지 시기의 문제일 뿐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버거워도 너무나 버거운 노동이었고 마치 내 인생이 노동으로 시작해 노동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절망감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한 번 농사일을 시작한 후론 나는 코뚜레 잡힌 소처럼 고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학교 공부보다 농사일이 우선이었다. 시험이 있어도 공부할 시간이 따로 없었고 초등 저학년 때 우수했던 성적은 점점 떨어져 중상위권에 머물렀다. 한여름 모두가 쉬는 한낮에 나는 더위를 피해 친구네 집에서 빌린 책을 들고 마을 둥구나무 위에 올라 모처럼 독서하는 영광을 만끽했다. 아무도 없는 나무 위 둥치를 소파 삼아 책을 읽으니 마치 동화 속 소공녀가 된 듯 스스로 위안과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들어오자 내 손에 들린 책을 본 엄마가 화를 내며 윽박질렀다.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얼른 호미 들고 따라와!"
내겐 언제부터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렸다. 속상했지만 엄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억울한 마음을 품은 채 엄마를 따라 밭으로 갔다. 밤늦도록 풀을 뽑은 건 너무나 당연했다.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위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우리 남매들은 아버지의 육순 잔치를 하기로 했다. 음식을 장만해 마을 어른들만 불러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전전날부터 장을 보고 전날도 음식 장만을 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주축이 되어 음식을 준비하느라 나는 매우 지쳤는데 새벽 4시에 엄마가 나를 깨웠다. 건넌방에서 언니가 자고 있었기에 언니도 깨울 줄 알고 "언니는 안 깨워?"라고 물으니 엄마가 "언니는 피곤하니 더 자야 해."라는 답이 돌아왔다. 왜 언니는 안 하고 나만 일해야 하느냐고 따질 법도 하건만 아프신 아버지와 새벽부터 큰소리 나는 것이 싫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혼자서 일을 해야만 했다.
언니는 실컷 자고 7시도 넘어 일어나서도 서둘러 일을 돕기는커녕 세수하고 치장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어릴 때부터 들일이나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던 나는 친정에 가면 엄마의 밥상을 받는 게 아니라 내가 밥을 차려 가족들을 챙겨야 했기에 나중에는 친정 가는 게 부담이 되었다. 친정에 가면 엄마는 갑자기 아프다고 했으며 언제나 돈 얘기만 내게 할 뿐이었다. 결혼 전 내가 번 돈 대부분을 고향 집에 갈 때마다 툴툴 다 털어주고 왔는데도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