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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던 봄날

배가 고파 먹은 가루

by 글마루

봄비가 종일 내린 날이었다.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며 대지를 촉촉이 적셔줬다. 비 맞은 새싹들에게 영양분을 주듯 비는 정겹게 내렸다. 아버지는 어디로 출타하고 아침을 먹은 엄마는 약에 취한 듯 방바닥에 붙어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동생은 낮잠 자는 엄마 곁에서 일어나라고 조르기도 하고 마루며 뒷문으로 왔다 갔다 하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있었다.


켜진 라디오에서는 가수 이은하의 '봄비'라는 노래가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성 간의 사랑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어렸던 나는 봄비 속에 누군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비가 오니 농사일로 시달린 엄마는 노곤하다며 내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다. 흡사 시체처럼 꼼짝하지 않았기에 덜컥 겁이 난 나는 엄마가 숨을 쉬는지 귀를 기울여 들어보기도 하고 감은 눈꺼풀을 양손으로 잡고 벌려보기도 했다.


성가실 법도 하건만 내가 그렇게 흔들어대도 엄마는 방바닥에 본드를 붙여놓았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라디오에서 알려주는 시계는 이미 점심때를 훌쩍 지나 있었다. 허기에 지친 나는 엄마를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뒷문을 통해 부엌으로 갔다. 부뚜막에 걸린 솥뚜껑을 열어봐도 빈 솥일 뿐 먹을 거라곤 눈을 닦고 찾아도 없었다. 다시 방으로 가 엄마에게 밥을 달라고 보챘으나 엄마는 잠꼬대 같은 소리만 하고는 옆으로 다시 돌아누웠다.


특별히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 비가 오니 몸이 축축 처진다고 했다. 배고프다는 내 말에 부엌에 가서 먹을 게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다. 깨워도 보채도 꼼짝을 않는 엄마를 포기하고 나는 다시 부엌으로 갔다. 혹시라도 라면이 있나 싶어 찬장이며 시렁이며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구석구석 찾아봐도 먹을 건 없었다. 그러다가 흰 비닐에 든 가루가 눈에 들어왔다. 빨간색으로 글자가 새겨진 비닐 속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있었다.


나는 그 가루가 설탕인가 싶어 손바닥에 덜어 살짝 찍어 맛을 봤다. 약간 맛을 봤을 때는 약간 밍밍한 것 같기도 하고 단맛도 나는 것 같았다. 배가 너무 고프니 뭐라도 먹어야 했다. 그 속에 든 가루를 손바닥에 쏟아 입에 툭 털어 넣었다. 순간 뭔가 이상한 맛이 느껴지며 속이 니글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밍밍한 맛에 속을 채우기는커녕 메슥거렸고 그걸 들고 방으로 가 엄마에게 물어보니 당시 전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은 조미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빈 속을 채우기는커녕 배를 쥐어짜는 통증에 결국 난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헹궈도 밍밍함이 사라지지 않아 오후 내내 왝왝거렸다.


난 그때 허리를 쥐어짜 듯한 배고픔을 느꼈고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자라서 우선순위를 먹는 것에 둘 만큼 음식에 집착했다. 다 먹지도 못하는 장을 봐 냉장고를 가득 채워야 마음이 편했다. 아픈 건 참아도 배가 고픈 걸 참기가 가장 힘들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때를 놓치면 어지럽고 기운이 없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후에도 학교 갔다가 점심을 먹지 못해 배가 몹시 고팠는데 엄마는 남동생을 업고 동네 마실 나가고 없었다. 허기가 지니 너무 기운이 없어 엄마를 찾아 밥을 달라고 하자 왜 배가 고프냐며 나를 야단쳤다. 허기에 지친 나는 계속해서 배고프다고 매달렸고 엄마는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가 밥을 차려주는 게 아니라 사촌언니를 시켜 큰집에서 내게 밥을 차려주라고 했다.


나는 사촌언니의 벌침 쏘이듯 눈총을 받으며 큰집 부엌에서 구정물 통 위에 걸쳐놓은 도마를 밥상 삼아 찬밥 한 그릇과 깻잎김치 하나로 밥을 먹었다. 미움과 눈총은 잠시였고 밥을 먹고 나니 허기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배고픈 증상이 지속되면 단순히 배가 고프다는 증상이 있는 게 아니라 뱃속을 쥐어짜는 통증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그렇지만 나를 살뜰히 챙겨주지 않는 엄마에게 어떤 대항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렸고 버림받을까 두려웠다.


이런저런 섭섭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어쩌면 엄마의 친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때맞춰 아버지가 나를 장난으로 놀리려고 강원도 진부령에서 주워왔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게 진실이라고 믿으며 어딘가에 있을 나의 친부모가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었다. 어린 내게는 세상 전부인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기에 내게 그토록 무관심하고 냉정하다고 짐작하며 혼자 남은 고아의 심정이 되어 서럽게 흐느껴 울기도 했다.


그렇게 서러움을 많이 느끼면서도 내 마음은 오직 엄마만 향해 있었다. 친딸이 아닌 나를 혹시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가난한 집에서 나를 버리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며 혹시 버려질지 모르는 불안함에 떨었다. 나는 지글거리는 사막 위에서 목이 타 마실 물을 찾듯 엄마의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나와 거리 두기를 하고 바라본 내 모습은 엄마의 사랑이라는 오아시스를 찾아 달궈진 모래 위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떠돌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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