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효과
친정 붙이가 전혀 없는 엄마는 이미 기가 죽어 있었다. 그것이 자격지심으로 이어졌는데 손위 동서인 큰엄마의 잔소리가 엄마 가슴에는 탑처럼 차곡차곡 쌓였고 그것은 자격지심과 절묘하게 조립이 되어 당신을 미워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자라면서 내 편이 없었던 엄마였기에 그것은 방어기제에 기반한 자연스러운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귀에 거슬리는 말을 곱씹기 일쑤였고 엄마 가슴에 자격지심을 암덩이처럼 키우며 자식인 우리에게도 세뇌하다시피 했다.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았던 기질의 엄마는 당당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표정이 시무룩해지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기에서 파생되는 스트레스를 자식인 우리에게 넋두리하거나 화를 풀곤 했다. 본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어린 우리에게 세뇌시키듯 말했고 무조건 엄마 편인 우리는 엄마가 얘기한 상황이 생길 때면 바른 소리를 했다. 예를 들면 명절이나 제삿날 서열이 막내 뻘인 엄마는 설거지를 도맡아 하거나 허드렛일을 했는데 엄마가 너무 고생한다고 여긴 나는 큰엄마들이 듣는 자리에서 왜 엄마만 힘든 일을 하느냐고 그만하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속으로는 불만이 많은 엄마는 늘 큰엄마들의 눈치를 봤고 그런 엄마가 난 그저 가여웠다.
그럴 때면 큰엄마들은 표정이 변하며 아무 말씀을 하지 않거나 "쟤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라며 못마땅하게 여기고는 했다. 나는 엄마가 고생하는 것이 마음 아파 용기 내 말했는데 그 순간 엄마는 그런 나를 호되게 야단치셨다.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듣고 그러느냐고 나를 몰아붙였는데 사실 그건 내가 엄마에게 귀가 아프도록 들은 말이었지만 엄마에게 그랬지 않느냐고 했을 때 엄마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나를 내몰다시피 했다. 본인의 입장을 난처하게 해서인지 나는 집에 와서도 엄마의 눈 흘김을 받아야 했기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도 기가 죽었고 말을 잘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벙어리가 되어 한 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큰엄마들이 "너네는 왜 그렇게 말을 안 하냐?"라고 물으시면 우리가 미처 무슨 말이라도 할 새 없이 엄마가 "버버리(벙어리)잖아요. 바보예요. 바보"라며 미리 대답해 버려서 우리는 귀 잘 들리는 청각장애인이 되어야 했다. 그런 부정적인 말을 듣고 성장해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한 건지 가장 가까운 자식을 나무라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긴 건지 알 수 없지만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우리와 다른 집의 자녀를 비교하고는 했다. 이를 테면 '누구 집 딸들은 아홉 살 때부터 밥하고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라며 우리가 철부지라며 혀를 차고는 했다.
동네에서 잔치가 있으면 배가 고픈 아이들에게도 잔칫날이 되었다. 그때는 잔치가 있으면 마을 아낙네들이 모두 잔치가 있는 집에 모여 십시일반으로 음식 장만하는 일을 했는데 가장 많이 했던 게 전 부치는 일이었다. 시멘트블록에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불을 때며 전을 부쳤는데 엄마가 잔칫집에 가기 전 우리에게 언제쯤 오면 먹을 걸 주겠노라는 언질을 줬다. 우리 세 자매는 때맞춰 엄마의 근처에 어슬렁거렸고 연기에 눈물 빼며 전을 부치던 엄마는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우리에게 맛있는 것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나무라셨다. 여기 왜 왔느냐는 꾸지람과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호통. 그러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전 쪼가리라도 쥐어줄 때도 있었고 아무 소득도 없이 무안함에 줄행랑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살다가 시집온 엄마에겐 '서울댁'이라는 택호가 붙여졌는데 그 호칭은 엄마에게 유일하게 존재감을 불어넣어 줬다. 가끔 서울에서 살 때의 풍족했던 생활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우리가 듣기에는 엄마는 서울 부잣집의 아씨처럼 고귀했다. 어릴 때 부산 살 때는 소령인지 대령인지 군인 집에서 수양딸처럼 맛있는 것 많이 먹으며 그 집 아이들만 돌봤으며 골목으로 팔러 다니는 해삼 장수에게 해삼을 자주 사 먹었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의 가난한 처지를 한탄했는데 자주 도망가고 싶다는 말을 해 나는 혹시라도 엄마가 도망갈까 봐 불안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마가 도망가면 아버지는 분명히 다른 여자와 재혼할 텐데 그러면 너희는 못된 계모에게 구박받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어린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엄마에게 매달리도록 했다. 그것이 어쩌다 속상해서 하는 말이 아닌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 인식하게 되었다.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큰엄마나, 사촌들에 대해 자주 불만을 토로하며 우리까지 합세해 미워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엄마를 가장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긴 우리에겐 엄마가 미워하는 대상도 우리에겐 적이었다. 어쩌면 그때 사람에 대한 적개심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힘들게 하고 속상하게 한 큰엄마나 사촌언니를 미워하는 대상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우리에겐 엄마의 말이 곧 법이었다. 어린 내게 무척 다정한 아버지를 죽도록 미워하게 만든 것도 엄마의 넋두리였고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은 폭력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릴 땐 세상 절대적인 엄마의 이야기만 진실이라 여겼기에 나도 약간은 비뚤어진 가치관을 가졌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 '교육학'과 '심리학'을 접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편견이었는지 깨달은 후로는 세상이나 사람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재정립하게 되었다.
그것은 엄마가 나쁘거나 악해서도 아니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이 가장 크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며 엄마는 어릴 때 부모에게 무조건적이거나 포근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기본적인 예의라든가 도리에 대해 배운 적이 없으니 남들보다 더 마음을 다치고 상처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자기 자식도 챙기기 어려웠던 전후 시대에 남의 자식에게 뭘 얼마나 살뜰히 챙겼겠는가. 학대받고 주눅 들고 눈치 보며 성장했을 거라는 걸 나도 나이가 든 후에 짐작하게 되었다.
엄마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어릴 때 힘들었던 점은 없었는지 물어보면 자신은 귀하게 대접받으며 자랐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엄마 말처럼 진정으로 귀하게 대접받고 자랐다면 자식인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의 여유를 나눠 주었을 텐데 자식인 우리도 믿지 못하는 건지 안타까움이 든다. 엄마의 과거를 파헤치려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가까이 이해하고 보듬어주기 위한 내 뜻은 무위가 되었다. 그래서 더 가여운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상처받은 기억들 너머로는 무시무시한 규모의 파도가 엄마를 인정사정없이 덮쳤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