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와 정성의 시소 타기
겨울이면 엄마는 가마솥에 물을 끓여서 방에서 커다란 고무통에 우리 세 자매를 목욕시켰다. 다른 계절은 기억에 남지 않는데 겨울에 하는 목욕은 상쾌하고 개운하기보다 뜨거움에 대한 공포로 가득했다.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나 배려가 부족한 것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목욕하기 알맞은 온도에 우리를 목욕시키는 게 아니라 뜨거운 너무나 뜨거워서 화상을 입듯 화끈거렸던 통증 때문에 우리 세 자매는 탕 속에 들어가기를 주저했다.
엄마가 탕 속에 들어가라고 엉덩짝을 때리면 발 한 짝을 물에 담갔다가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라고 다시 발을 빼고 그러면 엄마는 안 뜨겁다며 물속에 들어가지 않는 우리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 나는 지나친 뜨거움이 주는 통증에 몸서리를 치고 뜨거운 물에 반 튀겨지다시피 했던 피부는 빨갛게 상기되었다. 울며불며 치러야 했던 제물로 받쳐 주 듯한 의식. 물이 금방 식을 것을 대비해 미리 뜨거운 물에 씻기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겠지만 목욕은 나와 자매들에겐 거의 공포나 마찬가지였다.
목욕을 하고 난 후엔 외풍 부는 방 안의 기온으로 금방 추위에 와들와들 떨었다. 다 씻고 난 후의 개운함보다 자꾸 그때의 공포가 생각나는 것을 보면 조금만 엄마가 우리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들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성인이 된 후 자매들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엄마의 냉정함에 힘들었노라고 한 마디씩 하며 특히 뜨거운 물에 목욕시킨 것은 엄연히 학대라고 말하는 여동생의 의견에 나도 처음 '학대'의 의미를 떠올리게 되었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해 사회적 의식이 낮게 자리했던 당시는 아동의 인권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니 존중했던 어른들이 많지 않았다. 이렇듯 학습의 효과는 무서운 것이다. 아동의 인권은 차치하고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중 가장 하위 단계인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도 충족하기 어려웠던 시대상도 한몫했다. 먹고사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둘 수밖에 없는 당시에서는 밥을 굶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었다.
나이가 들어서 엄마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에게 다정다감하기보다 학대에 가까운 양육을 했던 엄마에겐 엄마가 없다. 부모가 있어도 입에 풀칠하기 바빠 자식 건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니 엄마 역시 따사롭고 자애로운 정을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기 자식도 줄줄이 딸려 있는 집에서 얼마나 정성을 들여 양육했을까. 학대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당시 사회였다. 게다가 엄마가 부모와 헤어지게 된 건 전쟁통이었으니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목욕이 가당키나 했을까. 어쩌면 엄마에게는 우리 자매를 목욕시키는 것이 최선의 노력을 한 건지도 모른다.
어릴 때 외갓집과 이모가 없어서 왜 없는지 물어보는 내게 엄마는 그냥 없다고만 했다. 내가 나이가 더 들어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고아'라는 개념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엄마의 냉정함에 서러웠던 마음은 싹 사라지고 그때부터 더 엄마를 생각하게 되었다. '가여움'이라는 그 감정은 오직 평생 엄마만 생각하는 딸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 인생에 엄마가 없는 삶은 있을 수도 없었고 나는 어떻게 하든지 부모 잃은 가여운 엄마에게 보상할 궁리에만 매몰돼 있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세 살 무렵 논두렁에 엎드렸던 장면과 총소리인지 대포 소리인지만 가득했다는 기억뿐. 그 후엔 친척이라는 어느 장군의 집에 양딸로 있었다고 한다. 친척인지 완전한 남인지도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그 집에서 애를 봐주다가 열몇 살에 이웃집에 식모 살이하는 아줌마의 꾐에 빠져 서울의 어느 집에 가정부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서울 집에서 애들 보고 밥하고 하다가 이웃에서 식모살이하는 처녀의 주선으로 아버지에게 시집왔다고 했다.
스물하나라는 이른 나이에 열 살 많은 가난한 농부에게 시집와 딸만 내리 셋을 낳았고 어디 갈 곳도 갈 수도 없는 산그늘만 에워싼 산골짜기에서 엄마의 한 많은 인생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살 때는 부모의 사랑은 못 받았지만 밥은 실컷 먹었는데 시골로 시집온 후에는 점심에는 나무하러 가는 사람만 보리밥이고 여자들은 고구마로 연명했다고 한다. 쌀밥만 먹다가 보리쌀이 대부분인 밥을 넘기려면 까끌거려서 넘어가지 않았다는 말을 레퍼토리처럼 했던 엄마에게 결혼은 구원이 아닌 파멸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친정 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엄마의 처지에서는 자그마한 말도 상처가 되고 자격지심으로 누군들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 하나 턱 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말 못 할 공허함이다. 어쩌면 엄마는 혼자 사막에 떨어져 나타나지 않은 길을 찾아 헤매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말 그대로 막막함 속에 자신을 오롯이 보듬어주는 이 하나 없는 인생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음에 가시 울타리를 수백, 수천 번을 더 쳤을 것이다.
우리 세 자매에겐 개운함에 앞서 두려움과 공포로 인식된 목욕이 관점에 따라 학대와 정성의 시소 타기가 되었다. 아버지는 다른 건 몰라도 엄마는 우리가 아기일 때 목욕만큼은 깨끗하게 시켰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예전엔 집 안에 수도가 없어서 샘에서 물을 길어와 아궁이에 불을 때 데워서 써야 했는데 안 좋은 기억 속에 묻힌 일들을 가만가만 글로 풀어보니 엄마는 엄마도 처음일 뿐만 아니라 받아보지 못해서 사랑을 줄 방법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니 새댁이었을 때 엄마가 가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