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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부지깽이

두려움의 상징

by 글마루 Mar 22. 2025

  타 다다닥 탁, 훨-훨


  아궁이의 불은 춤을 추듯 너울거린다.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은 엄마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물 바람이다. 나는 자주 보았다. 어두운 정지(부엌)에서 살아있는 건 오로지 이글거리는 불꽃이다. 그 불빛이 흘러내리는 엄마의 눈물을 너울너울 비추고 있었다.


  아버지와 말다툼이라도 하는 날이면 엄마는 자주 울었다. 사람이 우는 모습은 참 안쓰럽다. 우는 것 자체만으로 마음이 약해진다.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프고 속상해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생각할수록 서러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거짓 눈물로 동정을 사기도 한다지만 그건 아주 드문 경우일 것이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보면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목이 뻑뻑하고 가슴이 조였다. 울고 있는 엄마를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엄마이기에, 엄마라서, 엄마이기 때문에.


  재래식 부엌 아궁이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그 불이 고래를 지나 구들장을 데워준다. 그러면 찜질방처럼 방바닥이 뜨끈뜨끈해지고 단잠이 들게 해 준다. 농사일로 고단한 삭신은 구들장에서 고달픔을 사르르 녹였다. 부뚜막에 걸어놓은 솥은 밥을 짓기도 하고, 남은 숯으로 삼발이를 걸고 된장찌개를 끓이기도 했다. 석유풍로도 없는 집에는 오롯이 아궁이 하나에서 밥과 반찬을 같이 만들었다.


  엄마가 아궁이에 불을 피울 때면 엄마 곁에서 나무 동가리를 아궁이에 넣어보기도 하고 불타는 모양을 지켜보기도 했다. 또한 엄마 옆에서 같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정감이 들었다. 솔갈비 긁은 것에 불을 피우면 순식간에 타버렸다. 그것이 다 사그라지기 전에 잔솔가지 얹어 더 큰 불을 피우고 불길이 제대로 붙으면, 그때 굵은 나무토막이나 장작을 얹어야 불길이 잘 인다. 불 피우기는 쉬운 것 같아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꾸 하다 보면 요령이 생겨 잘 피울 수 있지만, 처음에는 불을 꺼트리기도 하고 애꿎은 성냥만 축낼 때가 많았다.


  부엌에는 나뭇가지가 그대로인 채 쟁여놓으면 그것을 일일이 손으로 부러뜨려서 꺾어 넣어야 했다. 좀 억세고 굵은 나뭇가지는 잘 부러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부러질 때의 반동으로 손은 회초리에 맞은 것처럼 아렸다. 특히나 한겨울에는 장갑도 없는지라 맨손으로 불 때기는 힘들고 불편했다. 불길이 일어 손을 쏘여 녹이면 아프고 시렸던 손이 누그러졌다.


  불길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부지깽이의 역할이 매우 컸다. 나무만 포개놓는다고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부지깽이가 살살 공기구멍을 내어주고 이따금 숨통을 트여주어야지 불이 제대로 붙었다. 부지깽이는 곧고 적당한 굵기와 길이의 작대기 끝을 살짝 태워서 닳아지면 부지깽이로 사용했다. 나무가 앞쪽부터 타기 시작하면 뒤에 남은 나뭇가지를 긁어 불에 올려주는 역할도 했기에 부지깽이는 불 때기의 지휘자쯤 되었다. 불씨와 나무, 부지깽이 삼박자가 어우러져야 부뚜막에 생기가 돌았다.


  내게 엄마의 모습은 논밭에서 일하고 집안일하는 모습도 있지만 가장 강하게 각인된 것은 역시 불 때는 엄마다. 엄마는 아궁이 앞에 퍼질러 앉아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봤다.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며 눈물이 철철 흐를 때도 있었다. 혼자서 흑흑 애써 울음을 참기도 하고 코를 훌쩍거리기도 했다.


  엄마가 가여운 나는 곁에 다가가


 “엄마, 울지 마.”


라고 말하며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더 감정이 격해져 목 놓아 울었다.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한참을 울다가 엄마는 잦은 한숨을 내뱉기도 하고 내게 분풀이하듯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딸의 애간장도 녹았고 아렸다. 내 가슴은 불안으로 덜덜 떨렸고, 영문도 모른 채, 나도 덩달아 눈물지었다. 그래서 부뚜막은 눈물의 부뚜막이다. 한참을 그러다가 한숨 한 번 푹 쉬고는 눈물을 훔치고 밥을 푸고 우리는 저녁을 먹었다. 밥상에서는 오직 정적만이 감돌뿐이었다. 나는 또 엄마가 울까 하는 걱정과 아버지가 역정 내지는 않을까 하는 갈림길에서 눈치를 살폈다.


  화력이 거세질수록 마치 용트림하듯 엄마의 오기와 아버지의 자존심이 사납게 충돌했다. 팽팽한 동아줄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을 만큼 그렇게 불길은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씨줄과 날줄이 만나 어우러져 옷감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무언가 맞지 않는 것이 서로 충돌해 부서졌다.


  불길이 꼭 그랬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애먼 부지깽이를 내려치기도 하고 불 속에 던져버리기도 했다. 아궁이는 엄마에게 분노와 슬픔과 서러움을 태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는지 모른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불을 지피며 눈물 한 번 짓고, 나무를 다독거리면서 한숨 한 번 내뱉는 동안 성질은 누그러졌다. 그러면 코 한번 팽 풀고 원래의 엄마로 돌아오는 적이 많았다.


  우리 자매들은 엄마의 부지깽이에 수도 없이 맞았다.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면 부지깽이 질 몇 번에 우리는 잠이 후다닥 깼다. 말을 듣지 않을 땐 엄마의 부지깽이 하나면 그만이었다. 엄마에겐 아궁이 지휘자인 부지깽이가 우리에게는 영락없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우리에게 부지깽이는 고통과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단잠을 자고 있을 때 느닷없이 휘두르는 부지깽이 질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 훌쩍거렸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한데 엄마는 우리를 키우면서 욕 한 번 안 하고 때리지 않고 키웠다고 할 때면 어안이 벙벙할 때가 있다. 내 귓전에는 ‘망할 년’이라는 어휘가 맴을 도는데도 말이다. 당시 마을의 아주머니들은 당신의 딸들에게 ‘마한 년(망할 년)’이라는 말을 이름 부르듯 했다. 그렇지만 그 ‘망할 년’ 소리를 수도 없이 듣고 자란 마을의 딸 중 진짜 망한 딸은 없는 것 같다.


  엄마뿐만이 아니라 당시 농촌의 아낙네들은 가난과 가부장적인 가정 문화 속에서 존중받지 못한 삶을 살았고 그랬기에 그 화풀이를 자신과 가장 닮은 딸을 통해 해소했을지도 모른다. 한글을 못 읽거나 더듬거리며 읽을 줄밖에 모르던 그녀들이 부모의 역할이나 아동의 심리에 대해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까. 그녀들의 의식 속에는 해야 할 농사일과 지긋지긋한 가난이 둑새풀처럼 엉켜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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