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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익은 아침밥

따뜻한 밥상이 그리워

by 글마루

지금 내 기억에는 엄마의 밥상이 중학교 3학년 이전에서 멈춰 있다. 내가 학업보다 들일이나 집안일을 돕기 시작하면서 나는 우리 집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소녀 가장처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양쪽 어깨를 잔뜩 짓누르는 느낌으로 성장했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고 우리 집에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건이 생겼다. 이제 와서 그걸 누구의 잘못이라고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 이후 엄마에게 밥상을 받기보다 내가 도맡아 밥하고 동생들 도시락까지 싸야 했으니 주말에는 궂은 농사일에 시달리고 피로를 풀지도 못한 채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해야 하는 고된 시간이 질기게도 나를 따라다녔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두 살 많은 언니와 아침에는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날이 많았다. 집에서 학교까지 5km의 거리를 걸어가려면 일찍 나서야 했기에 골짜기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더러는 버스를 타고 더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언니와 같이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버스를 타야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밥이 뜸이 들지 않아 설 익을 때가 많았다. 밥을 먹지 않으면 엄마가 야단을 쳤기에 우리는 감은 머리를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설 익은 밥을 몇 술 뜨고는 부리나케 뛰어 버스를 타야 했다.


우리가 늦잠을 자는 것과는 무관하게 조금 일찍 일어나도 늘 밥은 뜸 들기 전이었기에 어느 날은 생쌀이나 마찬가지인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버스를 놓칠 뻔한 적도 많았다. 어느 집이라고 특별히 다르지는 않겠지만 우리 집은 아침마다 전쟁이었다. 아버지는 굶고 학교 가면 안 된다고 걱정이셨고 애들 밥 주라는 성화에 엄마는 늘 허겁지겁 덜 된 밥을 퍼주었고 우리는 몇 숟가락 뜨는 흉내만 내다가 뛰어서 버스를 타야 했다. 어느 날은 재를 내려오는 버스를 보면서 뛰어간 적이 있는데 운이 좋은 날은 버스 기사가 기다려줬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버스를 놓쳐 걸어가야 했다.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뛰고 난 후에는 숨이 가쁘고 다리가 후들거려 맥이 풀린 적이 많았다. 아침 등교는 늘 전쟁을 치르듯 분주했다. 그땐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버스 안내양이 사람들을 억지로 밀어야 버스에 겨우 오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한 콩나물시루였다. 승객을 물건 재이듯 밀어 넣고도 버스 안내양은 문을 닫지도 못한 채 "오라이~"하며 문을 두 번 쾅쾅 치면 버스가 출발했다. 아무리 포개고 포개도 더 이상 발 올릴 자리가 없으면 버스는 사람을 태우지 않고 그냥 통과하기도 했다. 그 골짜기 동네에 최고로 학생이 많은 시절이었다.


우리가 늦잠을 자기보다 엄마가 늦잠을 자 아침을 늦게 준비하니 우리가 늘 바빴던 것 같다. 일어나서 바로 밥을 안치면 늦지 않았을 텐데 미리 밥을 해서 밥상을 차려놓은 기억은 없고 밥이 되길 기다리다가 마루에 서서 겨우 몇 술 뜬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다. 농사일에 피곤하니 우리에게 밥 해주는 것도 힘들고 귀찮아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신경질적일 때가 많았다. 없는 살림에 고된 농사일에 자식도 여럿이니 힘들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다른 집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렇지만 한 마을 친구들은 느긋이 밥을 먹고 여유를 부리며 버스를 기다렸기에 매일 밥이 늦은 엄마가 야속하기도 했다.


설 익은 아침밥이라도 엄마가 밥을 해줄 때는 그나마 행복이었다. 중학교 3학년 4월 어느 날, 못자리가 만들기가 끝난 후에 눈이 내리는 기이한 일이 있고 얼마 후 우리 집에는 크나큰 비극이 닥쳤는데 부부 싸움 후에 벌어진 엄마의 음독 사건이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우리의 삶에서 간혹 벌어지고는 한다. 남의 일이라도 놀랍고 충격인데 그 사건은 나와 우리 남매들에게 해일처럼 공포가 덮쳤고 미처 덜 여문 내 영혼을 무참히 짓밟은 크나큰 불행이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엄마는 살아서 돌아왔고 이후 나는 내 인생에서 '나'라는 주어를 빼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어린 동생들이 엄마를 잃을까 하는 걱정으로 나는 어떤 힘듦과 고통의 순간도 참아내야 할 정도로 촛불 속의 촛농이 되었다. 나 하나 녹여서 우리 가족이 해체되지 않는다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듯 나 하나쯤 던지고 싶었다. 엄마는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는 날이 많았고 엄마의 밥상을 받기보다 내가 손수 해서 차려준 기억이 많아 지우개로 뭉갠 것처럼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은 게 언제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한 소녀가 감당하기에 엄청난 충격은 수십 년 동안 트라우마로 남았고, 나는 몇 해 전 울면서 글 한 편을 완성하고 나서야 그때의 상처에서 한 걸음 물러날 수 있었다. 어쩌면 가족의 치부이자 개인의 치부가 될 수 있는 그 글은 치부를 까발리기 위함이 아니라 내 상처를 위로하고 비극으로 인한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읽을 때마다 눈물이 솟아오르게 하는 글을 용기 내 올려본다. 글을 쓰고서야 나는 비로소 예전의 한 소녀를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었다.



「머위, 쌈을 싸다」2022년 호미문학대전 가작 수상작


사람은 연어처럼 회귀성이 있는가 보다. 나이가 듦에 따라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습성이 있으니 그렇다. 또 하나 그 옛날 손사래 치고 역하게 여겼던 먹을거리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도 그렇다. 그토록 싫은, 죽도록 먹기 싫었던, 꽤 오랫동안 내 가슴에 생채기를 낸 게 있었으니 바로 머위이다.

아무개 뒤꼍에도, 마당 한구석에도, 언덕에도,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도, 대나무 그늘에도 마구잡이로 올라오는 게 머위이다. 반기지도 않지만 내치지도 않는 식물. 그 옛날 천대받던 나물이 요즘은 쓴맛이 몸에 좋다고 하여 찾아다니는 나물이 되었다. 아기 손바닥만 하게 땅바닥에 엎드리다 점점 토란대처럼 키가 크고 잎이 넓어지는 식물은 가꾸지 않아도 생명력이 강하다. 봄이면 고향 집 뒤꼍이나 산비탈 할 것 없이 비 온 뒤 죽순처럼 불쑥불쑥 올라오는 머위가 언제인가부터 그리워지는 건 단순히 식성이 변했다는 말로는 뭔가 이유가 불분명하다. 눈 딱 감고 잊고 싶었던 기억과 동시 소환되는 머위.

겨우 내내 먹던 김장김치도 떨어지면 하루하루 들녘의 냉이나 쑥을 뜯어 찬이 만들어진다. 찬 중에 유일한 반찬, 국과 찌개, 반찬을 통틀어 오직 하나의 찬으로 봄을 나기 시작한다. 냉이는 맛이 달콤 맵싸하다면 쑥은 약간 쓰면서 향긋하다. 멀건 된장을 풀어 냉잇국, 쑥국이 밥상에 자주 오르고, 그것마저 억세져 먹지 못할 때쯤이면 냄새도 역한 머윗잎 무침이 밥상에 오른다. 오직 데쳐서 된장에 무친 역시 단 한 가지 반찬. 어린 날은 누구나 비슷하듯 푸성귀보다는 달걀이나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어린아이가 특유의 비릿한 향을 풍기며 쓴맛이 강하고 쌉쌀한 머위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듯 머위는 내게 구황작물처럼 지긋지긋한 풀뿌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다 내가 머위나물을 떠올리기조차 두려운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중학교 3학년이 감당하기에는 공포를 넘어 충격과 두려움, 혼란 그 어떤 형용사를 동원해도 인간이 가진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집안의 치부이면서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가족사. 다행히 극한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춘기 소녀나 그 형제들에게는 영원토록 트라우마를 남겼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망치로 심장을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이 옅어지기는 했다. 벌써 사십 년 가까이 되었으니 그렇다.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해거름 녘,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는데 삽작*을 들어서는 부모님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그 전부터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는지라 또 다투시나 했지만 그날은 어쩐지 분위기가 더 살벌했다. 종일 계속되는 농사일로 지친 엄마는 악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옥신각신 가슴 조마조마하고 살 떨리는 순간에 내 심장은 마구 쿵쾅거리기도 하고 혹은 얼어붙은 듯 어떤 동작도 할 수 없으리만치 무기력해졌다. 어머니는 들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머윗잎을 한 소쿠리 뜯어서는 그날도 된장에 버무려 머윗잎 무침을 만들었다. 비릿하며 쓴맛이 도는 머위 냄새를 맡으며 나는 식욕이 뚝 떨어졌다. 그렇지 않더라도 밥을 뜨기 어려울 만치 분위기는 살벌했다.

부모님의 싸움은 더 격렬하고 살벌해지더니 날이 어둑어둑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동생들과 나는 두려움에 방구석에서 떨기만 했다. 그러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인데 나는 무서움에 몸이 굳어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오직 절망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던 때 어머니는 갑자기 재래식 화장실에서 무슨 병을 들고 와 꿀꺽꿀꺽 마시는 것이 아닌가. 누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다 마신 어머니는 바닥에 쓰러졌다. 우리 남매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이 뒤섞인 울음을 토해냈고 아버진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이웃들의 주선으로 병원으로 실려 간 어머니는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세 살배기 여동생이 밤새 엄마를 찾으며 우는 바람에 포대기에 동생을 업고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동생들을 모두 학교에 보냈지만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막내를 돌봐야 하고 소죽을 끓여 소에게 줘야 했기 때문이다. 동생을 업고 볏짚을 작두로 썰고 가마솥에 소죽을 끓여 소에게 먹였다. 삼일 밤을 동생들과 보내며 칭얼대는 막내를 업고 서성거렸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어머니가 사라질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어머니가 잘못되면 동생들은 어떡하나, 학교를 그만두고 동생들을 돌봐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짐에 가위가 눌렸다. 다행히 어머니는 사흘 만에 집으로 돌아오고 우리 집은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때까지 아무리 아파도 결석을 하루도 하지 않던 나는 연사흘 결석했고 학교에 가서는 담임선생님께 엄마가 아팠다는 이유밖에 댈 수 없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당하고도 나는 혹시 친구들이 알면 소문은 일파만파 커질 것이고 사람들의 멸시와 동정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사건은 내 가슴에 숨겨둔 채 오랫동안 열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가 되었다. 우리 남매들 누구 하나 이후 그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날의 공포를 떠올리기 싫어 잊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상처를 덮어둔다고 없어지지는 않는 법. 내 내면과 영혼까지 갉아먹던 트라우마는 내게만 공포로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가장 어렸던 막내만 기억을 잘하지 못할 뿐 훗날 동생 둘도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노라 토로했다.

성장하면서는 무능하고 어머니를 눈물짓게 한 아버지를 증오한 적이 많았다.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짐을 지워주는 부모님이 부담스러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불행한 가족사에 아버지나 어머니, 우리 남매는 모두 피해자일 뿐이었다. 비빌 언덕 하나 없는 환경과 계속되는 가난은 인간에게 상대를 배려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 사건 역시 가난에서 비롯된 비극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며 알게 됐다. 나라면 자식 보는 앞에 그러지 않았을 거라며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칼끝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고 소위 누워서 침 뱉기인 일이다.

그런 트라우마로 인해 나는 머위를 먹지 못했다. 특유의 강한 냄새와 함께 소환되는 지우고 싶은 충격 때문이다. 고된 농사일을 하고 지쳐 단내를 푹푹 풍기며 어머니는 머윗잎을 삶고 나는 또 머위냐며 코를 싸쥐었다. 냄새만 맡아도 비위가 상하니 내겐 고역이었던 나물. 삶아 무쳐놓은 나물은 검은 녹색을 띠었고, 음식이라 여겨지지 않는 내겐 거친 잡초와 다름이 없었다. 머위를 먹지 못한 것은 동반되어 연상되는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들녘에 저절로 자란 머위나 시장 난전에 할머니들이 뜯어 파는 머위만 보면 어머니의 지쳐 쓰러질 듯한 모습이 투사돼 내 옆구리는 늘 쓰라렸다.

시골로 이사 온 집 뜰 귀퉁이에 머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른 봄 땅속을 뚫고 여린 잎 몇 장이 고개를 쑥하고 내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키도 커지고 잎도 넓어진다. 여전히 내겐 가슴 아픈 머위지만 머윗잎을 뜯어서 찜기에 쪄 강된장에 싸 먹는다. 쌉쌀하고 쓴맛과 머위 특유의 향내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많이 아프고 슬펐지만 지난 과거는 모두 추억이 되는 것. 특별히 보살피지 않아도 제멋대로 잘 자라는 머위는 생명력이 강하다. 어떤 고난과 상처도 견디어 내고 일어서는 나도 머위를 닮은 건 아닐까. 머위를 보며 동질감을 느끼다니. 머윗잎 펼쳐 내 아픔도 한 숟가락 올리고, 동생의 놀람도 한 숟가락 올리고, 우리의 슬픔도 한 숟가락 올려 머위 쌈을 싼다. 머위 향을 머금으며 이젠 가만가만 내 유년의 나를 어루만져줄 때다.


*삽작: 대문의 경상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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