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의 사슬
'설상가상'이라고 가난과 불행으로 점철된 우리 집은 불행이 칡넝쿨처럼 질기고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는데 어쩌면 그때가 내 인생 처음이자 최고로 힘겨운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 혹독한 현실에서 아직은 어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강제로 태워진 기차를 탄 기분이랄까. 한 번 오르면 영원히 멈추지 않을 선로 위를 달리는 듯 나는 억지로 떠밀려 불안함과 공포감만 잔뜩 껴안은 채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글로 옮기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공황장애가 올 것처럼 괴롭고 불안하다. 엄마의 음독 후 나는 말 그대로 소녀가장이 되었다.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겨운 나날들. 아침에 날 깨우는 아버지는 내게 미안해하셨기에 나는 힘들어서 짜증을 내거나 말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나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불을 때 주고 나무를 날라주는 등 마음의 짐을 지우시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불을 때 밥을 짓고 동생들 도시락 싸고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 다시 저녁을 하고 빨래를 하는 등 성인의 주부도 버거워하는 일을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는 방에 누워서 운신을 하지 않았기에 엄마에게 드릴 죽을 끓이든지 약을 달이는 일로도 쉴 새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했는데 아직 어린아이가 죽을 끓여 엄마를 일으켜 세우고 떠먹여 드리기까지 했으니 이젠 그때의 나는 참 착하고도 대견했노라고 칭찬해주고 싶다. 사실 나는 엄마께 지극정성으로 진심을 다했으나 현재 내 기억으로는 엄마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가 아프기 전 배탈이 났는지 설사에 구토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못 먹는 나를 나무라기만 했다. 가뜩이나 마른 몸에 아프기까지 하니 나는 기운이 없어 쓰러질 것 같았고 그때 생각난 것이 배추된장국이었다. 그걸 먹으면 나을 것 같아서 엄마께 말했더니 그게 왜 먹고 싶냐고 윽박질렀다. 학교에 갔다 오니 배추된장국을 끓여놔서 먹고는 기운을 차린 것 같다. 지금도 엄마께 섭섭하고 아쉬운 점은 내게 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보다는 늘 윽박지르고 화를 내야만 했나라는 의문점이다.
철천지 원수처럼 싸우고 그 사달이 나 자식들이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지 일 년도 안 되어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났는데 엄마의 몸이 점점 통통해지고 아랫배가 유난히 볼록해졌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우린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마을 의형제처럼 지내는 아재가 봄이 오기 전 어느 날 저녁에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 집 마루로 올라섰다. 우린 그때 엄마의 임신을 알았다. 여동생과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달이 난 지 얼마나 되었으며 적지 않은 나이에 임신이라니. 아버지는 쉰을 바라봤고 엄마도 마흔이 가까웠기에 당시로는 노산 중의 노산이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없는 형편에 자식은 이미 오 남매나 되었다.
아재가 찾아온 이유는 엄마에게 낙태를 권유한 것이었는데 동네 사람들 모두 우리 집 형편을 걱정하고 그들끼리 의논을 하다가 고민 끝에 어려운 말을 꺼내기 위해 대표로 찾아온 것이다. 아재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아버지도 더 이상 자식 낳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엄마가 우겨서 낳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유가 너무나 황당한데 이미 생긴 생명의 소중함이 아니라 임신하면 살이 찌고 몸이 좋아진다는 말에 우린 어이가 없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겠지만 엄마는 임신을 하면 식욕이 좋아지니 자연히 살이 붙게 되었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철없는 우리가 들어도 너무 황당무계했다. 임신했을 때야 그렇다고 쳐도 출산을 하면 산모에게 무리가 가는 것은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유산(낙태)이 뭔지 모르는 나는 오래전 남동생이 뒤늦게 태어나고 난 후 엄마가 병원에 다녀온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아랫집 할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는데 정확히는 몰랐지만 병원에서 아기를 지웠다는 내용은 알았다. 그땐 유산이 병원 가서 주사만 한 대 맞으면 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어른들끼리 하는 얘기로 동네 누구 아주머니가 애를 지웠다는 말을 자주 들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지 몰랐다. 임신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던 내가 낙태를 어떻게 하는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해서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아기를 쉽게 지울 수 있는 줄 알았다.
아재는 가뜩이나 지금도 먹고살기 어려운데 자식을 더 낳아서 어쩌겠다는 것이냐며 진심으로 우리 가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충고를 했다. 동생과 나는 그 사실에 너무 충격받아서 엉엉 울었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엄마께 아이를 낳지 말라는 편지를 썼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여기며 나는 아이를 지우라며 우린 모두 반대라고 원색적이고도 강한 표현으로 편지를 썼고 다음날 학교 가기 전 안방 문 앞에 편지를 두었다. 편지를 쓰는 순간도 배신감 같은 감정에 휩싸였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절망을 느꼈다. 자식들을 그리 놀라게 해 놓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처음으로 엄마의 자식이라는 게 수치스러웠다.
전날 밤도 뜬눈으로 새다시피 했으나 학교에 가서도 뜻밖의 현실에 답답하고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내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또 하나 엄마의 성격을 아는지라 우리가 쓴 편지로 인해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순간은 죽는 한이 있어도 엄마의 출산을 막고 싶었다. 차라리 땅이 꺼지거니 지구가 폭발했으면 하고 바랐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큰 사건 후에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니 내 가슴은 하루 종일 불안감으로 두근거렸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려니 이젠 집에 가기가 주저되었다. 그렇지만 갈 곳은 집밖에 없었기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사립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해가 져 어두컴컴한 우리 집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돌았다. 내가 집으로 들어서는 걸 본 엄마는 계속 훌쩍거리기만 했다. 아버지가 왜 우냐고 물어도 아무 대답도 않고 울기만 하다가 여동생이 마루에서 뜨락으로 내려섰는데 느닷없이 엄마가 찬물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한 서린 저주의 말을 우리에게 내뱉었다.
"이년들이 감히 엄마에게 그게 무슨 편지냐? 오늘 다 같이 죽자!"
라며 악을 악을 썼다. 아직 봄도 오지 않은 저녁은 겨울이나 마찬가지였다. 찬물을 덮어쓴 여동생은 비명을 질렀고 깜짝 놀란 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나오며 엄마께 왜 그러냐고 물을 때 우리는 도망쳤다. 도망이라고 해야 뒷동산 대숲이었지만 엄마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는지라 우린 겁을 집어먹고 집 뒤 대숲으로 숨은 것이다. 눈이 와 미처 녹지 않은 대숲에 동생과 나는 차가운 눈 위에 손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얇은 티셔츠만 입은 데다 찬물까지 뒤집어쓴 동생은 추위에 덜덜 떨었지만 집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엄마가 너무 무서웠고 차라리 죽고 싶었다.
생각 외로 대숲은 포근했고 우린 잠시지만 그 공간이 아늑하다 여겼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쫓기듯 도망 나온 우린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한참을 캄캄한 대숲 속에 매복한 군인처럼 엎드렸다. 편지는 같이 썼는데 애꿎은 동생이 찬물세례를 받아 안쓰러움을 느끼며 우린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도 제대로 못 키우면서 다시 자식을 낳아서 어떻게 키울 거냐는 말만 되풀이한 채 밤은 점점 깊어졌다. 세상은 모두 고요 속에 잠긴 듯하고 가끔 새소리만 들리는 대숲에서 우린 한참을 그렇게 포복해 있었다. 엄마에게 잘못했다고 빌기는 죽기만큼 싫었고 그때만큼 집이 싫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걱정된 아버지가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화를 내지 않고 추운데 집에 들어가자고 하셨다. 분명히 엄마에게 편지에 대한 내용을 들었을 터인데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이 추운데 밖에서 떨었냐며 따뜻한 방 안으로 우릴 데려갔다. 엄마에게는 애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달랬고 엄마는 여전히 저 못된 년들이라며 악을 악을 써댔다. 동생과 나는 몰려오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구들장에 몸을 눕히자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몇 달 안 있어 아기가 태어났는데 아들이었다. 아버지, 여동생과 밭에 가서 김을 매고 오니 엄마가 아기를 낳았다. 동생이 태어나는 것을 그토록 반대했지만 막상 동생이 태어나니 귀하고 사랑스러웠다. 그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가 내게 지어보라기에 나는 소설 속 괜찮아 보이는 인물인 '기수(달릴 기, 빼어날 수)'라고 지어줬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봄 모심기가 한창일 때 둘째 남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얼굴이 뽀얀 아기는 어여뻤다. 낳기 전에는 반대했지만 아버지도 우리도 모두 그 아이를 돌보고 귀여워했다. 그 아이는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보행기를 타고 부르면 웃으며 달려왔고 우리 집엔 잠시 웃음과 행복이 깃드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