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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의 보호자가 되어

원망으로 돌아온 삼 년

by 글마루

고향 집에만 가면 그치지 않는 장맛비가 종일 쏟아지듯 우울한 분위기만 맴돌았기에 잠시 다니러 가서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직장으로 돌아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직장생활도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할 무렵 내 인생을 구제해 줄 것만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동안 남자를 한 번도 사귀지 않아 보는 안목이 부족하기도 했거니와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그가 진심으로 보였기에 그 마음이 변치 않을 거라 믿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지친 나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책임진다는 사람과 결혼했다. 내 짐을 나누어지겠다는 말에 감동해서 믿어보고 싶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동생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명문고라 불리던 김천고등학교보다 새롭게 떠오르는 구미고등학교 둘을 놓고 고민하다가 부모님이 남동생에게 구미고로 갈 것을 권했다. 그 이유는 내가 있었기에 따로 방을 얻고 밥을 해 먹는 부담을 덜 수 있어서였다. 난 시댁과 남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누나가 구미에 있으니 누나 집에서 다니면 되겠다는 말을 했다면서 거절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구미로 고등학교에 온다고 하자 다행히 남편이 큰 반대를 하지 않았기에 내심 고마웠다. 반대라도 하면 친정 부모님께 어떻게 말씀드릴까 난감하던 차였다. 남동생은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와 구미고에 입학했고 날씨가 우중충하고 쌀쌀맞은 3월에 입학식에 따라갔다. 그리고는 나는 고등학생 동생을 둔 보호자가 되었다. 말이 동생이지 자식처럼 거둬야만 했던 상황에도 나는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당연하다 여겼다. 학기가 시작되며 보충수업에 야간자율학습까지 하느라 남동생은 밤 10시가 넘어 귀가했다.


나는 남동생에게 매일 도시락을 두 개 싸서 손에 들려주었다. 친정에서는 부식비는커녕 남동생이 학교에 내야 할 돈과 용돈까지 내게 빌리기만 할 뿐 갚아주지 않았다. 부모자식 사이인지라 나도 딱히 받을 생각이 없었고 엄마도 대신 돈 주라는 말만 할 뿐 그때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집을 사느라 받은 대출금에 이자를 갚으며 박봉으로 살림하려니 남동생에게 풍족하게 해 줄 수 없었다. 이래저래 시댁이나 남편에게는 눈치가 보였고 나는 또다시 가족들 눈치를 봐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댁 식구들은 남동생을 데리고 있는 나를 비꼬듯 말했다.


나는 얼마 안 있어 아들을 낳았고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육아와 남편 뒷바라지, 남동생 뒷바라지를 하느라 또다시 고달픈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졌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 한여름 더위에 등에 업은 아들은 빽빽 울어대고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 아침 먹여 출근시키면 남동생 밥을 차려주고 도시락을 들려 보냈다. 거기에다 군 제대한 시동생까지 함께 살게 되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내 주변인들은 집안에 행사가 있으면 당연히 내게 기대했고 무슨 일이 있으면 모두 우리 집으로 몰려왔기에 나는 시댁 식구와 친정 식구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인 상황이 되었다. 육아만 해도 힘든데 밥을 하루에 7번씩 차려야 했고 설거지하고 돌아서면 밥을 차려야 할 정도로 잠시 쉴 짬이 없었다.


설상가상은 셀 수도 없이 우리를 덮쳤는데 오래된 기와집을 부수고 새 집을 지을 당시 속이 좋지 않은 아버지는 병원 갈 시기를 놓쳤고 집이 겨우 완공되어서야 병원에 방문했다. 곧이어 이어지는 잇따른 불행은 바로 아버지가 위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집을 지으면서도 돈을 여기저기 빌려서 지었고 잔금을 납부하지 못해 아들 돌 때 들어온 금반지를 모두 팔고 적금까지 깨서 보태줘야 했다. 남동생을 데리고 있는 것도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었는데 몸도 돈도 마음도 모두 벅차기만 현실은 잔인하기만 했다. 집 짓느라 든 빚에 아버지 위암까지 엎친 데 덮친 현실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아버지가 위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을 때 남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충남대나 어디 먼 곳에 합격했으면 좋았으련만 합격한 곳이 하필이면 구미에 있는 금오공대였다. 그동안도 적잖이 많은 지출을 하면서도 내색조차 하지 못했는데 내가 힘든 것은 문제가 안 되었는데 시댁에서 들고일어났다. 시아버지는 전화해서는 대놓고 내게

"네 동생 데리고 있으면 나도 네 집에 방 한 칸 차지하고 있을 테니 그리 알아라!"


라고 하시며 대놓고 남동생을 내보내라고 윽박지르며 욕설까지 퍼부었다.


진퇴양난도 그런 상황이 또 있을까? 아버지는 생사를 오가고 있었기에 친정에 알릴 수도 없었다. 그동안의 삼 년도 남동생과 나는 살얼음판을 걷듯 남편 구박과 눈치를 보느라 몰래 울기도 많이 했었다. 남동생이 매우 조용했는데 말썽 한 번 안 피우는 동생이 인사성이 부족하다며 짜증을 냈고 내게 혼을 내지 않는다고 화를 내곤 해서 속상함이 많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아이가 태어나고는 더욱 눈치를 봐야 했다. 이런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부식비는커녕 오히려 섭섭해하는 눈치를 보였기에 중간에서 나는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았다.


게다가 남편과 시댁의 구박과 폭언은 점점 심해졌고 이혼을 할까 고민했지만 그땐 막막하기만 할 뿐 갈 곳이 없었다. 게다가 내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어떻게든 그 고난을 견뎌내려고만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남동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시댁에서 남동생을 내보내라는 의사를 엄마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시댁의 구박에는 서러웠고 내 처지를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내게 서운해하는 엄마에겐 야속해 혼자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미안함과 죄책감만 잔뜩 끌어안은 채 삼 년 뒷바라지하고 돌아온 것은 엄마의 원망과 냉대였다.


내 인생에는 크게 두 가지 의식이 나를 사로잡았는데 바로 부채 의식과 죄책감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남동생을 뒷바라지했건만 끝까지 동생을 책임지지 않았다는 원망을 대놓고 들어야 했다. 집안을 더 도와주고 결혼하지, 일찍 결혼해 도움이 안 되었다면서, 동네 사람들이 누나가 남동생 공부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는 말까지 전해주면서 나를 원망하는 말에 나는 무너졌다. 그렇게 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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