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파우스트
난 친구가 거의 없다.
고등학교 졸업 후 친한 친구들은 모두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고 나는 덩그러니 다시 수험생이 되었다. 힘들었던 건 오르지 않는 성적이 아니라 친한 친구들과 공유할 주제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대학 생활에 바빴고, 나는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이 슬펐다.'나를 다독이고 걱정해 주는 건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라며 혼자되기를 결심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이후로 난 내 근심거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거의 없다. 말해봐야 약점만 생기고 달라지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감정 따윈 생략하고 정중하게 부탁하면 그만이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기면 근처 서점으로 갔다. 회사와 가까운 거리임에도 점심시간 서점엔 회사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회사를 언제까지 다녀야 하지?'라는 회의감이 들 때면 자기 계발 코너로 갔었고, '저런 사람하고 어떻게 일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는 관계 심리학 코너로 갔다. 상황별 몰입독서를 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고민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책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자주 만나는 친구가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파우스트'다. 이 친구와 만날 때는 매번 다른 의미로 위로받는다. 이 책 주인공 파우스트는 모든 학문을 섭렵했지만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며 괴로워한다. 악마 메페스토펠레스는 어떠한 삶이라도 파우스트가 원하는 삶을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는 대신, 한순간이라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면, 즉시 그의 영혼을 데려간다는 내용으로 거래한다. 결국 파우스트는 쾌락에 빠지고 수없이 방황한다. 쾌락을 즐기고 싶지만 존경받고 숭고한 영역에도 오르고 싶은 파우스트는 두 개의 자아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건 아마도 매일 마주하는 내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적당히 즐기자는 생각과 더 나은 나를 위해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는 고민이 반복됐었기 때문이다. 악마와 함께 동행하는 그의 과감한 스케일의 쾌락 여정은 짜릿하고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이 작품을 통해 큰 깨달음 하나 얻게 된다. 노력 없이 원하는 것을 쉽게 달성하는 건 달콤하고 짜릿하지만 그 대가가 기다린다는 것을 말이다. 본인의 성공을 위해 상대를 비방하고 짓밟으며 빠르게 올라간 자리는 자신의 치부가 독이 되어 오래 유지될 수 없고, 꾸준한 노력으로 얻어진 성취는 늦게 도달할지라도 인정받으며 오래 머무를 수 있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 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이 깨달음을 얻으며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이 지혜로움을 몰라서 노력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옳은 길을 알면서도 그 길을 왜 그토록 가기 어려운 것일까. 천상의 서곡에서 주는 악마가 파우스트에게 접근하겠다 말할 때 그를 말리지 않고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활동력은 너무 쉽사리 느슨해져, 무조건 쉬기를 좋아하니, 그에게 적당한 친구를 붙여주기 위함이니라" 악마의 행동들이 결국 선을 위한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메페스토텔레스 또한 파우스트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 나는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 내는 힘의 일부분 입지요"생각지 못한 시련이 오거나 결핍이 생길 때 이 문장들을 떠올리곤 한다. 이 책은 내게 노력하는 한 방황할 수밖에 없고, 누구나 시련에 빠진다며 위로한다. 이 책의 두께감은 다소 부담스럽지만 마음을 울리는 글에 밑줄 긋다 보니 어느새 나만의 명언집이 되어버렸다. 글을 마감하는데 6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만큼 글이 숙성되어 깊은 울림으로 전해진다. 문장 한 줄 한 줄마다 꼭꼭 씹어서 내 것으로 소화시키고 싶어 자주 읽다 보니 표지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내 서재에서 늦은 시간에도 만날 수 있고, 어떤 감정도 도닥여주며 항상 노력하라고 다그쳐 주는 나의 적당한 친구가 있다.
[ 디자이너가 바라본 cover design ]
고전문학은 믿음사에서 책들로만 구입하게 되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처음에 산 책이 믿음사였었고, 한 두권 서가에 꽂힌 모습이 일관성 있게 정리되어 책 찾기가 수월 했다. 한두 권씩 사다 보니 어느새 서재 한켠을 장식하게 되었는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대부분 문호들의 작품은 한편으로 끝나는 경우가 없는데 어떤 작품에는 작가 사진이나 초상화가 삽입되어 있고, 그 외 다른 작품 표지에는 명화가 주로 쓰였다. 무슨 기준일까 생각해 보니 대표되는 작품 혹은 가장 작가의 색채가 잘 묻어나는 책에 작가 얼굴이 새겨진 것 같았다. 마치 얼굴도장을 찍듯이 말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작품의 경우 ’ 괴테와의 대화‘에서 초상화가 표지로 쓰였고, ’ 파우스트‘에도 다른 느낌의 초상화가 쓰였는데, 그림 속 그의 모습이 굉장히 여유 있어 보였다. 표지의 작품은 '요한 H. W. 티슈바인'의 <로마 캄파나의 괴테>이다. 그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활약한 독일의 화가로 이탈리아에서 1799년까지 지냈으며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 괴테와 만나 같이 여행을 하며 가까워졌다. 초상화 속 괴테는 당시 로마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인 크고 넓은 회색 모자를 쓰고 아이보리 컬러 여행자 코트를 입고 있다. 로마시대 유적들로 둘러 쌓인 로마 캄파나를 배경으로 앉아있는 자세와 시선처리는 편안해 보인다. 전원적이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작품 속 괴테는 생을 마감하기 전 지혜를 얻고 떠난 파우스트의 의연하고 담담한 모습과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