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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감 없는 팔'의 공포

by DesignBackstage

가족들 모두 각자 방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실에서 익숙한 성인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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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스피커 소리였다. 황당한 질문에도, 짜증 내며 한 질문해도 항상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고 느꼈던 그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가족 중 누구도 거실에서 무언가를 검색하지 않았고 핸드폰 연동 기능도 꺼져 있었다. 당혹감에 생각의 가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갑자기 작동시키지 않은 로봇청소기까지 움직인다면 벌벌 떨면서 문고리를 잡고 있을 것 같았다. 오작동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누군가 해킹을 한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즐겨보던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미러'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았다. 이 시리즈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생길 수 있는 불편하고 낯선 상황들을 그리며. 미래사회를 디스토피아적으로 표현했다. 고증이 잘된 사례들이 스토리를 탄탄하게 구성하고 있었고, 심지어 몇몇 에피소드들은 현실에서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사실 이런 낯선 상황이 며칠 전에도 있었다.


그날은 주말 점심의 사람들이 북적이는 미술관이었다. 이곳에서는 극사실주의 조각으로 주목받고 있는 '론 뮤익'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인기가 많은 전시로 한참을 기다려 관람했다. 오랜 기다림 때문일까? 언론에서 말한 극찬 때문일까?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작품 앞에 섰다. 그의 작품 <In Bed> 앞에서 나는 감탄보다는 당혹감을 먼저 느꼈다. 허공에 시선을 매단 중년의 여성이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자다가 잠시 깬 건지, 잠들기 전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뿌리볼륨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머리, 미간의 세줄 주름, 푹 파인 눈과 다크서클, 불그스름한 볼을 따라 흐르는 팔자주름은 실제 인물을 뛰어넘는 섬세함이 돋보였다. 천천히 일어나 엉거주춤 기지개를 켜는 모습까지 상상할 정도로 리얼했다. 기지개를 켤 때 주위에 있다가 저 손으로 맞으면 날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작품이 주는 압도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 움직일 것 같다고 느낀 건 감정이 가득 담긴 얼굴 표정과 섬세한 얼굴근육뿐 만은 아니었다. 내게 큰 당혹감을 준건 긴장감 없는 그녀의 팔이었다.

론 뮤익 <In bed>

그녀의 팔은 힘을 잃은 지 오래된 듯 보였다. 이두근과 삼두근의 경계는 희미했다. 근육은 사라지고 무게만 남은 느낌이었다. 팔 안쪽은 푸르스름한 핏줄이 비치고 있었고, 바깥쪽은 빛바랜 듯한 불그스름한 살결이었다. 팔꿈치 아래쪽은 회갈색과 보랏빛이 엷게 겹쳐져 있었다. 손끝으로 누르면 흔적이 오래 남을 것만 같은 피부로 덮어진 무거운 팔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감정들이 눌려 있는 듯했다. 팔뚝에 표현된 감정들이 나를 당혹시켰다. 고요한 표정과 팔의 탄력정도로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당혹감을 넘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모습에 관람객들 모두가 감탄을 쏟아냈다. 이젠 외적인 모습만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어쩌면 사람보다 더 사람 같아 보이는 작품들 앞에서 누가 더 진짜 같은가를 가늠하는 건 무의미해 보였다.


무서운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시기별로 달랐다. 어린 시절의 공포는 학교괴담이나, 홍콩 할머니 귀신이야기처럼 상상 속 무서움이었다. 대부분 본인이 실제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며,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공포는 좀 더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이 됐다. 카드 결제일, 갑자기 아프다는 부모님의 연락, 회사의 구조조정, 부동산대책 등 시선을 돌리는데 마다 있었다. 그 공포감을 하나씩 줄여가며 사는 게 어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느끼는 공포는 전혀 느껴본 적 없는 공포였다. 형체는 없지만 나를 꽤 뚫고 있는 듯한 인공지능, 생명은 없지만 사람보다 더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듯한 가상의 인간. 들리지만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들을 수 없는 공포와 보이지만 보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공포는 우리가 여태까지 겪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 확신이 생기고 더 이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나이를 불혹이라고 한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니 낯선 공포가 나를 흔들었다. 아파야 청춘이고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라는 말처럼 아직도 어른이 되는 중인가 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새로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나의 미래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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