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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병'에 담긴 온기

관심이라는 선물

by DesignBackstage

회사 근처 파스타집에서 후배와 점심을 먹었다. 이 식당은 한국적인 식재료를 사용해 이탈리아 음식을 만드는 곳이었다. 처음 보는 생소한 메뉴들로 가득했다. 처음 들어보는 음식들 하나하나 신중하게 맛을 상상하며 주문했다. 그렇게 주문한 음식은 '참나물 스파게티', '고사리 알리오 올리오'였다. 참나물과 고사리를 무침으로만 먹어봤던 나로서는 다른 조리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이 조합이 과연 어울릴지 설레며 맛을 봤다. 참나물을 곱게 간 소스가 들어간 스파게티 위에 참나물이 수북하게 올려져 있었다. 스파게티 면의 부드러움과 아삭한 나물을 함께 먹으니 식감이 좋았고, 마치 스파게티를 쌈 싸 먹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참나물 특유의 쌉쌀한 향과 치즈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지며 맛이 풍성하게 느껴졌다. 이런 식재료의 조합을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나물들을 가지고 실험을 했을지 생각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며 흥미로운 F&B시장 트렌드에 대해 떠들었고, 미식가 후배는 맛을 음미하며 음식의 재료를 하나씩 맞추며 즐거워했다. 한 음식을 두고 각자 좋아하는 분야에 따라 다양한 대화가 오갔던 꽉 찬 점심시간이었다.

그리고 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며칠 동안 '참나물 스파게티'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아이디어도 너무 좋고 새로운 조합이 너무 맛있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월요일이었다. 출근하자마자 큰 머그잔에 코가 빠질 정도로 깊이 머리를 박고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눈만 빼꼼 내밀고 있는 후배가 초록빛병 하나를 내밀었다.

"선배, 주말에 제가 만들었어요."
병뚜껑 위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참나물 페스토>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배는 그때의 맛을 기억해 내며 올리브유, 참나물, 마늘, 소금등을 넣어 만들었다고 했다. 본인도 너무 맛있어서 만들어보려 열심히 재료분석을 했는데 좀 넉넉히 만들었다고 한다. 바질페스토 레시피에서 바질을 참나물로 바꿔 만들었다는 후배가 근사해 보였다. 유리병을 열자마자 퍼지는 신선한 향보다 후배의 정성스러운 마음이 더 깊고 진하게 느껴졌다. 손끝으로 다듬은 초록빛 소스는 창문 밖 초여름 햇살보다 설레었다. 그날 아침, 나를 깨운 건 진한 커피 향이 아니라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참나물 향이었다.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잊지 못할 선물이다.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친구 Y가 자신도 잊지 못할 선물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Y는 생일 때마다 남편이 고가의 귀걸이를 선물로 한다며 투털 댔다. 나는 부담스러운 금액의 귀걸이를 사 오는 게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3년째 귀걸이 선물을 받고 있는데 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 아무리 맘에 안 드는 선물을 받아도 고마운 마음이 먼저일 것 같은데 화가 난다니 도대체 영문을 몰랐다. 그런데 Y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Y는 단 한 번도 귀를 뚫거나 귀걸이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Y가 귀걸이를 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Y는 급기야 이 선물은 이혼절차를 밟을 때 부인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목록으로 남겨놓기 위한 선물인 거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선물은 얼마나 비싸고 고급스러운가 가 아니라 나를 얼마나 관심 있게 바라봤는가에 따라 감동의 크기도 깊어지는 것 같다. 평소 생활 패턴은 어떤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상대를 애정 어린 사선으로 관찰하고 준비한 선물은 상대에게 큰 감동을 준다. 아무리 좋은 글로 감사 인사를 전해하더라도 나를 위해 써진 글이 아니라면 귀찮은 스팸문자와 다를 게 없다. 난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상대에게 선물을 주려고 노력한다. 선물을 준비해 가는 과정은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과 같기 때문이다. 꼭 대단한 선물이 아니어도 된다. 평소 상대가 하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필요한 시기에 주면 된다. 오히려 작고 섬세한 선물이 더 감동적이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친구에게는 꽃 선물을, 요리에 관심 있는 친구에겐 독특한 향신료나 식재료를, 해외여행을 준비 중인 부모님께는 비상약과 온열찜질 팩 등을 챙긴다. 선물은 받을 때보다 줄 때 더 큰 기쁨이 있었다. 상대가 기뻐할 모습을 떠올리며 선물을 준비하는 순간들은 늘 설렌다.


후배는 참나물페스토를 건네며 아이들과 함께 스파게티 만들어 먹으라는 말도 곁들였다. 아이들과 회사 근처까지 오기 힘든 내 상황까지 고려한 따뜻한 마음이었다. 반면에 Y가 받은 귀걸이는 무관심의 선물이었다. 남편은 선물이 맘에 드는지 물어보지도, 착용한 모습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선물을 준다는 건 마음을 전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어떤 마음을 담느냐에 따라 따뜻한 온기가 전달되기도 하고 쓸쓸한 빈자리가 생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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