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는 일에 대하여
'웨~엥' 기분 좋게 잠들려는 시점에 극적인 모기의 등장이다. 당황스럽지만 해결방법을 알고 있다. 벌떡 일어나 불을 켜고 누웠던 자리를 샅샅이 살펴 모기를 잡으면 된다. 하지만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다. 너무 졸리고 귀찮아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부끄럽지만 잠결에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누우면 이불 안으로 모기가 절대 못 들어오겠지!'
손으로 허우적거리며 이불을 등밑으로 구겨 넣었다. 손과 발을 하얀 이불 안에 넣고 꽁꽁 감쌌다. 순식간에 거대한 누에고치 한 마리가 탄생했다. 모깃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불속에 숨었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누에고치는 이불을 걷어차며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짝' 소리와 함께 평화가 찾아왔다. 벽지에 붉은 핏자국은 흥건했고, 새벽녘에 쏟아지던 잠은 메말라 버렸다.
난 좋고 싫은 게 분명한 편이다. 모기는 싫어하지만, 여름은 좋아한다. 새는 싫어하지만, 새소리는 좋아한다. 가십거리 수다는 싫어하지만, 생각과 지혜를 나누는 수다는 즐겁다. 내가 드러나는 건 두렵지만, 사람들과 글은 나누고 싶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늘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얽혀 돌아가곤 한다. 모기가 있다는 건 여름이 왔다는 뜻이며, 새가 있기에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벼운 수다를 떨다 보면 새로운 생각과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매력적인 글을 나누기 위해선 나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빛을 내기 위해서 스스로를 태워야 하는 초의 운명처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결국, 그 일을 지키기 위해 불편함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예전 회사에서 10여 년 간 디자인 트렌드 리서치 업무를 했다. 각 브랜드의 패션쇼나 기술 박람회, 각종 전시를 통해 가장 먼저 새로운 디자인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마치 미래를 앞당겨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늘 설레고 즐거웠다. 하지만 발 빠른 정보를 많이 접할수록 방대한 해외자료를 번역하고 정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숫자와 데이터를 표로 정리하는 작업을 유난히 싫어했지만, 경쟁사 분석 보고서나 제품별로 사용된 CMF(Color, Material, Finish: 컬러, 소재, 마감) 표 정리를 위해 늦은 시간까지 데이터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 고된 과정을 거쳐야만 스타일 별 새로운 디자인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힘든 과정 뒤 얻어낸 결과물은 더 큰 보람과 즐거움으로 돌아왔고, 업무 평가 또한 좋았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간 시간들로 알게 됐다. 귀찮고 힘든 일은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과정이라는 것을.
퇴사 후 가족들과 함께 식자재 유통회사를 경영을 하게 됐다. 디자인 리서치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 경쟁사 분석부터 브랜딩, 마케팅까지 직접 다양하게 실행해 볼 수 있었고, 그 과정은 회사에서 일할 때와는 또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아주 잠깐이었다. 매출현황을 항상 지켜봐야 했고 매출감소 원인을 분석해야 할 뿐 아니라, 직원들 간의 사소한 다툼과 근태관리도 신경 써야 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힘든 일은 역시 숫자와의 전쟁이었다. 재무제표와 손익계산서를 봐야 했고, 품목 별 재고 파악, 경비 내역등 봐도 봐도 어지럽고 힘들었다. 원활한 업무를 위해 전산·회계 수업을 추천받았다. 관련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이 많이 보는 온라인 강의였다. 세 번째 강의쯤 듣고 나니 세 가지 질문이 생겼다. '분명히 한국말로 강의하는데 난 왜 잘 못 알아듣는 거지?, 고등학생들이 수준이 꽤 높은데?, 이 수업을 끝까지 들을 수 있을까?' 새로운 수업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강의를 여러 번 들어야 했다. 전혀 다른 언어를 배우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수업 진도는 아직도 더디고 느리다. 하지만 더딘 과정 뒤 로컬 감성 제품들로 지역만의 색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독보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으로 오늘도 수업을 듣는다.
사실 우리는 모든 문제의 답을 대부분 알고 있다. 모기를 빠르게 잡는 법을 알고 있고, 살을 빼는 방법을 알고 있다. 성적을 올리는 법도, 회사에서 인정받는 법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핑계를 자꾸 만들어 낸다. 누군가가 대신해 주길 바라며 미루고 또 미룬다. 꼭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