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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칼국수가 떠오른 거야

다름이란 무엇인가!

by DesignBackstage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에 있는 시댁에 가던 중 자꾸 따라오는 꽃이 있었다. 고속도로 옆으로 펼쳐진 노란 꽃들은 바람에 일렁이며, 황금빛 햇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금계국
와 꽃 너무 예쁘다.
코스모스처럼 생겼는데 노란색이네?
무슨 꽃일까? 저번에는 못 봤던 거 같은데?


쉼 없이 바깥 풍경을 보며 중계를 시작했다. 아마도 꽃이 더 이상 안 보여야 오디오가 멈출 것 같았다. 나는 계절별로 고속도로의 풍경이 다른 건 옆에 핀 꽃들 때문인 거 같다고 말했고, 덕분에 고속도로 길이 막혀도 지루함이 덜한 거 같다고 이야기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혼자 속사포로 수다를 떨었지만 아이들은 모두 뒷자리에서 잠들어 있었고, 남편은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남편은 눈이 커지면서 반응을 했다.


어? 여기 능이백숙집이었는데,
칼국수집으로 바뀌었네?
교차로 앞에 있어서
항상 능이백숙집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나가는 길이구나 생각했었거든!


꽃들 위로 저 멀리 큰 간판에 '칼국수'간판이 큼직하게 세워져 있었다. '능이백숙'에서 바뀐 간판이라 했다. 그 길을 자주 다녔지만 나는 능이백숙 간판을 본 적 없었고 남편은 꽃이 철마다 바뀌는지, 아니 꽃이 피어있는지 조차 몰랐다. 계절의 풍경 속에, 뜨끈한 칼국수가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자연스럽게 점심 메뉴 이야기로 이어졌다. 조용하던 남편은 쉼 없이 무슨 음식을 먹을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평양냉면 이야기 할 때는 같이 맞장구를 쳤지만, 머릿속은 온통 꽃의 이름은 무엇일까 계속생각 하고 있었다. 꽃 이름은 '금계국'이었다. 고속도로 옆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금계국은 정돈되지 않아 더 아름다웠다. 우린 많이 달랐다. 나는 감각으로 큰 흐름을 이해하는 편이고, 남편은 눈앞의 현실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데 익숙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그날 내가 본 것은 여름의 풍경이었고, 남편이 본 건 늘 지나던 길의 이정표였다. 같은 풍경도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몇십 년 전 결혼 준비과정부터 서로가 많이 다름을 느꼈었다. 나는 몇십 년 뒤, 아이들과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웃고 떠드는 풍경을 그리며 즐겁게 미래를 그렸지만, 남편은 곧바로 집 계약과 평수 얘기로 넘어갔다. 그런 남편이 왠지 차갑게 느껴졌었고, 남편은 그런 나를 비현실적인 몽상가처럼 여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부지 예비 신부였다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 또한 조금씩 그와 닮아가는 것 같다. 근데 참 아이러니 하게도 평소 즐기는 것들을 보면 성향과는 대비되는 부분들이 있다. 나는 경제경영서나 자기 계발서처럼 명확한 정답이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책을 즐겨 읽는다. 반면, 남편은 여운이 남는 소설이나 결말이 열린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음악을 듣는 취향도 그렇다. 나는 랩처럼 직설적이고 딕션이 분명한 음악을 좋아하고, 남편은 슬픈 단조에 감성적인 가사가 담긴 노래를 즐겨 듣는다.


어느 분야든 총량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감성과 이성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고하는 영역에선 감성적으로 반응하지만, 즐기는 순간만큼은 오히려 이성적인 선택을 더 선호한다. 각자 채워지는 영역이 다를 뿐 결국 총량이 맞춰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법칙은 법칙이고 일상은 일상이다. 현실은 언제나 법칙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 것처럼 이해가 안 될 때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같은 장면 속에도 다양한 서사가 그려진다. 어느 하나의 시선이 정답일 수는 없다. 각자의 관심사와 방식은 서로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고, 우리가 서로의 시선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그 차이가 세상을 더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만들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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