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익숙함
여름옷장을 정리하다 보면 흰 티 앞에서 항상 신중해진다. 이 티는 올여름에 과연 입을 것인가! 수거함에 들어갈 것인가! 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얀 반팔티도 다 같은 티셔츠가 아니다. 소재의 탄탄한 정도, 넥 부분의 라운드의 크기와 마감처리, 옷의 구김정도에 따라 캐주얼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클래식하게 정돈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기본적인 형태는 비슷해도 옷의 디테일 하나에 손이 자주가 기도하고 몇 년째 서랍 안에 그대로 있기도 한다.
기본적인 흰 티 하나를 살 때도 겉으로는 익숙한 흰 티를 원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만의 특별한 디테일이 있길 바랐다. 그런 ‘기본 이상의 무언가’를 찾았을 때, 손끝이 먼저 반응하고 마음도 그쪽으로 자꾸 기울어졌다.
내가 '기본 이상의 감각'에 특별한 끌림을 느낀다는 걸 알게 된 곳이 있다. 회사 출장 중 잠시 들른 비트라 캠퍼스에서였다.
비트라 캠퍼스는 스위스 국경 근처, 독일 바일암라인(Weil am Rhein)에 위치한 스위스 디자인 브랜드 비트라(Vitra)의 본사이자 복합 문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세계적인 건축물뿐 아니라 디자인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수많은 의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의자들을 보는 책에서 보던 것들이 아닌 살아있는 디자인들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놀이공원에서 마음껏 소리 지르고 웃던 그날처럼, 들뜬 감정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에임스 라운지체어(Eames Lounge Chair)의 묵직한 존재감, 팬톤 체어(Panton Chair)가 던지는 장난기 어린 컬러와 실루엣, 위글사이드체어 (Wiggle Side Chai)의 구블거리는 골판지 의자를 바라보는 건 놀이동산 퍼레이드를 보는 것처럼 흥겨웠고, 그 의자에 앉아보는 건 롤러코스터 보다 짜릿했다. 수많은 의자들을 체험하고 눈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많은 디자인 역사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나만의 공간에 어울리는 의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집 인테리어와 어울리는 하나의 아이템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의자에 앉아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상상하며 마치 보물 찾기라도 하듯, 하나하나 샅샅이 살폈다.
화려하고 존재감 있는 의자들 사이에서 자꾸만 시선이 머무는 의자가 있었다. 특별한 소재도, 눈에 띄는 디자인도 아니었다. 프랑스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장 프루베의 스탠더드 체어(Standard Chair).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 당장 구입하는 것도 아니고
상상 속에 앉아볼 의자라면
화려하게 꿈꿔볼 법도 한데,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게
'기본' 의자라니!'
하지만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어쩌면 익숙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탠더드 체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이상하게 익숙한 실루엣을 읽어냈다. 군더더기 없는 나무 판과 금속 프레임.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교실의 철제 의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등받이와 좌판이 나무 합판으로 이루어졌고, 회색 철제 프레임은 매끈하지 않았지만 견고했다. 늘 삐걱거렸고, 엉덩이에 자국이 남을 만큼 딱딱했지만, 내 하루의 절반을 함께했던 의자.
뜻밖의 자리에서 마주친 익숙함에 괜히 마음이 흔들려, 일단 앉아 보기로 했다 그 딱딱하고 불편했던 학교 의자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앉은 순간, 의자는 마치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것처럼 편안했다. 모든 것이, 예상과는 전혀 갈랐다. 놀란 마음에 벌떡 일어나,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곤 곧 차이를 발견했다. 학교 의자와는 다르게, 프루베의 의자는 앉는 좌판이 엉덩이 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나무판은 앉는 순간 미끄럼틀을 타듯 몸이 자연스럽게 뒤로 미끄러졌다. 그렇게 무게중심은 자연스레 뒤로 쏠렸다. 그 무게를 앞다리에 비해 굵게 설계된 뒷다리가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살짝 기울어진 그 각도는 어린 시절엔 미처 알지 못했던 ‘편안함’을 알려 주었다.
그랬다. 나는 익숙한 것에 끌렸다. 기본적인 형태 위에 더해진 작은 기울기. 그 하나의 디테일이 이 의자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익숙함은 다가오게 만들고, 그 안에 숨겨진 디테일은 머무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용히 품고 있는 물건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사람을 사로잡는 특별함이라는 건 생각보다 사소하고 조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