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혁신적인 기술
"너 이 옷 입으니까 허리가 되게 귀엽다."
대학교 2학년 초여름 무렵의 일이었다. 유난히 손가락이 길고 예뻤던 같은 과 동기 오빠가 다정하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평소 말이 없던 오빠가 내게 보낸 관심은 구체적이었고,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 '아, 이렇게 사람들 많은데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떡해!'라고 생각하며 그 짧은 시간 동안 오빠와 캠퍼스에서 손잡고 다니는 상상을 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우연히 TV에서 바다표범이 나오는 장면을 봤다.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온 이들이 다 같이 물개박수를 치며 말했다.
'바다표범 몸이 너무 귀엽지 않아요?'
순간 빙하에 갇힌 기분이었다. 미끈하게 떨어지는 통짜 몸의 바다표범을 보며 나는 내 몸을 내려다봤다. 그렇게 나는 자몽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자몽의 씁쓸함이 내게 잘록한 허리를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다. 매뉴얼에 나오는 대로 매 식사마다 자몽을 먹는데, 아침에는 삶은 달걀과 블랙커피, 점심에는 닭가슴살, 저녁은 생선구이를 먹어야 했다. 활동량이 많고 주로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내가 2주간의 다이어트 식단을 지키는 게 쉽지 않았다. 배는 고프지만 살은 쉽게 빠지지 않았고 식단을 못 지킨 날이 반복되면 무기력 해졌다. 허기짐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오는 날엔 어김없이 폭식으로 이어졌다. 외부활동이 많았던 나는 자몽을 구하기 어려워 다이어트를 실패한 거라 생각했다. 그 후엔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달걀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말 그대로 아침, 점심, 저녁을 달걀만 먹으면 되는 심플한 다이어트였다. 학교 갈 때에도 삶은 달걀만 챙기면 되니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문제가 됐던 건, 사흘이 지나자 삶은 달걀만 봐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는 점이다. 그 뒤로도 별별 다이어트가 이어졌다. 바나나, 고구마 등 원푸드 다이어트, 레몬 디톡스 그리고 큰맘 먹고 도전했던 한방 다이어트와 허벌라이프까지. 효과가 있다는 소문만 들리면 늘 그렇듯, 나는 망설임 없이 온몸을 던졌다. 이십 대의 다이어트는 내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다. 단 한 번도 A를 받지 못했던 과목. 그 뒤로도 예쁜 옷을 입기 위해, 결혼준비를 위해, 출산 후 부기를 빼기 위해, 건강을 위해, 시기별로 이유는 모두 다르지만 단 한순간도 다이어트를 잊고 지낸 날이 없었다. 다이어트를 위해 쏟은 노력과 비용은 삶에 꽤 높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칠 법도 한데 사실 삶의 질을 생각하면 절대 포기할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최근 간헐적 단식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SNS에는 ‘공복 성공’ 인증샷이 넘쳐나고, 주변에서 공복시간을 늘려 효과를 봤다는 이들이 많았다. 결국 나도 그 흐름에 올라탔다. 간헐적 단식은 혈당과 인슐린 수치가 안정화되고 지방 연소에 유리한 몸을 만든다고 한다. 먹는 시간과 안 먹는 시간을 나누어 일정한 리듬으로 식사하는 방법은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도 개선시킨다. 몸의 건강을 위해 더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오후 12시에서 7시 사이에 식사를 했다. 점심으로 단백질과 탄수화물 지방 섬유질등을 골고루 든든하게 먹고 7시 전에 배가 고프면 삶은 달걀과 호밀빵 단백질 스무디 등을 먹었다. 17시간 공복을 지켰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간헐적 단식으로 일주일이 지나자 조금씩 체중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른 영양소가 들어있는 다양한 음식을 먹다 보니 다이어트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스트레스와 식탐이 줄었고, 식사 횟수를 줄이니 식사시간과 비용도 줄었다. 무엇보다 장소와 환경이 바뀌어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맘에 들었다.
간헐적 단식은 심플했다. 복잡하게 식단을 챙기는 일에서 벗어나 한 끼만 고른 영양식단으로 채우면 된다. 무엇보다 가장 놀란 부분은 사십 평생을 식단관리에 신경 썼다. 하지만 그보다 먹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을 땐, 바다표범의 몸뚱이를 볼 때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식사가 달라졌다. 적게 먹겠다는 생각에서 더 맛있게 먹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하루 한 끼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더 좋은 식재료와 더 맛있고 건강한 조리법을 찾게 되었다. 예전에는 생 당근을 그대로 씹어 먹던 내가 이제는 당근라페를 만들어 색깔별로 가지런하게 샐러드까지 곁들인다. 그렇게 채워진 한 끼는 내 충만한 하루의 중심이 되었다.
적게 먹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먹는 것이 중요하고, 무엇을 먹는 가가 아니라 언제 먹는 가가 중요하다는 것. 이 단순한 원칙은 식사뿐 아니라 내 일상에도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오전 시간은 자연스럽게 공복 상태로 보내고 그 시간 동안은 가장 집중이 잘 되는 일에 몰입했다. 식사 시간이 명확해지니 오히려 일정한 리듬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혁신적인 기술이 개발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의 편의를 높이기 위해서라 생각한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며, 일상 속 불필요한 수고를 덜어준다.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가장 큰 변화를 주는 것. 내가 최근 경험한 가장 강력한 라이프스타일 기술은 바로 간헐적 단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