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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트 뚜껑'을 찾아서

by DesignBackstage

20년 전 그저 멀어지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계획도 목적도 없었다. 그렇게 훌쩍 떠난 여행에서 내가 모르던 나를 만났다. 뜻밖에도, 요거트 얇은 은박뚜껑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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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졸업 후 6개월간 광고회사 취업에 연달아 실패하며 방황하고 있었다. 내가 광고회사에 입사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단순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던 나는 전공수업인 광고디자인 수업시간에 유독 칭찬을 많이 받았다. 내가 잘하는 걸 업으로 삼아가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광고디자이너가 돼야겠다 결심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수많은 국내외 공모전에서 수상이력 있는 경쟁자들이 쏟아졌고, 가고 싶은 광고회사는 채용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 남들은 어찌나 취업을 잘하는지, 동기들이 취업했다며 건네는 명함은 유난히 두껍고 근사해 보였다.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애매한 상황이 점점 길어졌다. 그럴수록 나는 불안하고 조급 해졌다. 그리고 조급함이 커질수록 판단은 흐려졌다. 전공이나 내 능력과는 무관한 일에 무작정 지원했다. 심지어 기상캐스터 공고에 지원 준비를 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상캐스터는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다니며 발성과 발음, 다양한 전문가 과정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그때는 전혀 몰랐다.)


나는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누구나 알 만한 회사의 명함이 갖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동기들의 취업 소식에 웃어주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나를 몰라주는 취업시장이 괜히 서운했고,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어 졌다. 축하 자리에 빠질 수 있는 핑계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국을 지나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이렇게 넓고 새로운 세상이 있었구나! 역사의 흐름이 그대로 느껴지는 건축물들 앞에서 나는 말없이 압도당했다. 현실감을 잊은 채 각 나라를 탐색하느라 바빴다. 이틀간격으로 나라를 이동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가벼운 발걸음에 비해 아랫배는 무거웠다. 딱딱한 바게트 빵과 버터만으로는 장 운동이 될 리 없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식료품점에서 요거트를 구입하는 걸로 일정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각 나라별 마트 탐색이 시작됐다. 스낵, 유제품, 바디용품등 형형색색의 제품을 보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제품의 특징에 맞게 동물 모양이나 로고 형태로 인쇄된 바코드, 각 나라의 언어로 제품명이 타이포그래피 된 패키지를 보는 일은 늘 설렜다. 지금은 해외 제품을 직구와 다양한 채널등을 통해 만나볼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처음 보는 제품들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식료품점은 어느새 잠깐 필수품을 사는 경유지가 아니라, 여행의 일정을 차지하는 주요 일정이 됐다. 더 크고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마트를 찾아다녔고, 구입한 요거트 얇은 은박 뚜껑 부분을 물로 씻어 말린 뒤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뚜껑뿐이 아니었다. 미술관 티켓, 지하철 승차권, 관광지 안내문 등 여행의 모든 기록을 모았다. ’ 꿈에서 깨어나면 잊히는 꿈 내용처럼 이 여행의 기억이 흐려질까 두려웠던 걸까?‘


그렇게 컬렉터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 중에 독일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가 기억에 남는다. 같은 방에 묶게 된 그 친구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유럽여행 중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서로정보를 공유하다 직접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그런데 사진들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유럽의 풍경은 거의 없었고, 화장실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공공화장실부터 자신이 묵었던 숙소화장실까지. 그녀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모든 화장실을 다 경험해보고 싶다 했다. 화장실에 그 나라의 많은 문화가 보인다는 말도 했다. 그때 당시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뭔가 여행의 뚜렷한 목적이 있는 그녀가 나와는 다르게 대단해 보였다. 나는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에 대해 그녀와 말을 나눴다. 오히려 처음 만나는 이에게 가감 없이 더 솔직한 감정을 쏟아냈었다. 그녀는 여행을 하며 네가 관심이 생기고 흥미가 생기는 것들에 집중해 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따르다 보면 그게 뭔지 모르지만 분명 네 길이 보일 거라는 말과 함께, 맥주 한잔 없이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해주는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 그녀의 따뜻한 말에 마음이 열린 걸까?‘ 나는 내가 모았던 티켓과 요거트 뚜껑을 펼쳐 보이며, 여행 정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걸 보던 그녀는 내가 화장실 사진을 볼 때처럼 눈이 동그래졌다! 요거트 뚜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내 화장실이야!", "무슨 말이야?"라고 물으니 그녀가 웃는다.


"우리는 관심 있는 것들을 모으게 돼있어!
나는 그게 화장실이고,
너는 이 뚜껑이야!"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화장실과 요거트 뚜껑에 관심 있는 여자애들 둘의 만남이라니, 유럽 한복판에서 나누는 대화의 소재가 옹졸하지만 무척이나 흥미로운 조합이라 생각했다.


다음날 그녀는 떠나고 나는 어김없이 식료품점에 가서 장을 봤다. 그녀와 대화 후에 들른 마트는 단순히 장 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생겼다. 마트는 마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여 있는 선물가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저녁 내가 모아놓은 수많은 라벨과 팸플릿들을 가만히 펼쳐보았다. 이 많은 것들을 모은 이유는 여기에 담긴 내 기억을 채우기 위한 용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용도라면 사진이나, 글로도 충분했다. 내가 이것들을 수집한 건 그것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때 알았다. 나는 패키지 디자인, 편집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가 탐색해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수업 때 몇 번 들었던 칭찬만으로 성의 없게 진로를 결정했던 것이다.

나를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만들어가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6개월간의 취업준비보다 20일간의 여행이 더 깊이 있게 느껴졌다. 모두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숨고, 먼 곳으로 도망쳤던 이곳에서 반짝이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귀국 후 내 여행을 주제로 포트폴리오를 새로 만들었다. 여행의 하루를 샤이니 데이(Shiny Day)'라는 콘셉트로 구성했다. 내가 일어나 아침을 먹고 미술관 관람 후 장을 봐오는 일정에 맞춰 사용한 제품들의 패키지 디자인을 새롭게 했다. 요거트, 바디용품, 화장품, 미술관 티켓, 굿즈, 스낵, 맥주 패키지 디자인을 해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후에 이를 스토리 텔링이라 불렀다.


다행히도 자신이 가장 잘한 디자인만을 모아 포트폴리오로 제출했던 다른 디자인 전공자들과 나를 다르게 봐주는 회사가 있었다. 무려 800: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나는 화장품 회사 그래픽 디자이너로 취업에 성공했다. 회사 취업 후 채용 담당자를 통해 들으니, 헤어 브랜드담당 디자이너를 찾고 있었는데, 제품뿐만 아니라 브랜드 전체를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아서 높은 점수를 줬다고 말했다. 그때 내 나이 25살이었다. 그동안 나를 알아 봐주는 회사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동안 내가 나를 알아봐 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유럽여행을 다녀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 왜 이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시간이 지나고 내가 바라보는 시선도 2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나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수집하고 있을까? 나를 탐색하는 시간을 다시 한번 가져보려고 한다. 40대 나의 요거트 뚜껑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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