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머물다간 '띠지'

찰나의 디자인

by DesignBackstage

사람이 처음 누군가를 만나 호감을 느끼기까지 걸리는 시간, 단 3초.

사람의 첫인상은 불과 3초 만에 결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사람뿐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에도 적용되는 듯하다. 여행지에서의 첫 느낌, 처음 만난 물건이나 사이트에서도 첫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나는 서점에서 특히 이런 경험을 자주 한다. 매대에 놓인 책들을 바라보다 책 표지와 제목만으로 호기심을 느끼고, 호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표지의 다양한 모습 위로 한 겹 더 씌워진 띠지는 존재감을 더욱 과시한다. 유명 평론가의 추천한 도서, 유명 채널에 소개된 책, 해외 판매량 1위 등 현란한 카피들이 책 매력을 한껏 뽐낸다. 출판사들의 띠지 마케팅 기술에 홀린 듯 책을 읽다가 구매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렇게 구매한 책들을 나는 띠지를 절대로 벗기거나 떼어 놓지 않고 읽는다. 책을 선택했던 감정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과 띠지에 쓰인 카피 한 줄을 뽑아내기 위해 고민이 많았을 출판사에 대한 예의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책을 정성스레 읽고 책장에 꽂아둔 책을 중3 아들이 읽고 나면 어느 센가 띠지는 사라지고 없어졌다. 띠지뿐 아니라 책전체를 감싸고 있는 커버까지 홀라당 벗겨져 있었다.


책의 매력을 높여 독자들 눈에 띄게 하는 띠지는 책을 읽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지만, 사실 책구매 후엔 더 이상 역할은 없다. 띠지로써 기능을 다 한 것이다. 아들은 책을 덮고 있는 커버가 거추장스럽고 책이 헐겁게 느껴져 손에서 책이 미끄러지고 독서의 몰입을 방해한다고 했다. 분명 띠지를 찾으라고 하는 잔소리에 시달릴까 봐 둘러대는 핑계라 생각했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커버를 찾을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띠지 없이 책을 읽었다. 손바닥에 미세하게 마모가 잘 되지 않은 듯한 거친 종이의 촉감이 느껴졌다. 그 거친 종이 결이 손끝에서 마음으로 번져지며 책과 나 사이의 거리가 확실히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마치 텍스트 그 자체와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랄까?


요즘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가능성을 중시한다. 여러 기업에서 일회용 제품 사용으로 무분별한 자원 낭비를 막고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제품을 오래 쓰고 버리지 않고자 노력한다. 이는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며 기업에 윤리성으로도 이어진다. 때문에 제품 개발에 있어 소재와 물성등 다양한 측면에서 신중한 결정이 이루어진다. 오래도록 쓸 수 있도록 튼튼한 내구성은 기본이고 폐기된 후에도 오염이 되지 않도록 자연 분해가능소재를 사용한다. 하지만 모든 제품이 지속가능한 디자인이 될 수는 없다.


분명, 일시성을 갖는 제품들이 있다. 제품의 포장지, 커피홀더, 팝업스토어, 책띠지 등이다. 대부분 제품이나 브랜드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제작물들이다. 이것들은 제품이나 브랜드에 순간적인 감정을 끌어올려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한다. 이런 디자인은 순간이 오래 기억되길 바라며 기능보다는 감성을 중시한다.

3초 안에 모든 첫인상이 결정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확실한 첫인상을 주는 '찰나의 디자인'인 것이다.


내가 띠지를 쉽게 버리기 어려웠던 건 아마도 책을 구매하던 그 시기에 작가가 내게 건넨 말 같았기 때문이다. 띠지에 적힌 한 문장이 책을 집어 들게 만들었다. 랭킹이나 유명세를 내세우기보다 책의 울림 있는 글들로 독자를 이끄는 것이 강력한 마케팅 기술이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이 두려웠던 2021년. 나를 낚았던 띠지

곱게 싸놓은 작은 선물이 장난스레 풀려 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던 띠지 제거 사건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처음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책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자유롭게 오가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이 나누라고 쓰인 책을, 나만의 방식으로 꽁꽁 싸매 전시하려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내 손을 거쳐 아이의 손으로, 다시 또 누군가의 손으로. 책은 이제 한층 자연스러워진 모습으로 책장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띠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곱게 접혀 책갈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독서의 몰입과 내 아쉬운 마음을 모두 절충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지속 가능성이라는 가치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띠지에 쓰인 그 한 줄처럼, 감정의 울림이 오래 남는 것이 어쩌면 가장 깊은 지속 가능한 디자인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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