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박나무와 호박엿

제주살이 2일 차

by DesignBackstage

오전 9시. 방학인데 늦잠은 자야 제맛이에요 라고 말하며 잠든 아이들을 깨울 수 없었다.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아이들의 잠들어 있는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았다. 그동안 출근 준비하느라 부랴부랴 나가면서 아이들 눈 한번 못 맞춘 건 당연하고 자는 아이들에게 그날 해야 하는 일들을 쏟아내고 뛰어나가기 바빴던 때를 기억해보면 아이들 자는 모습이 이렇게 예뻤나 하면서 소리 없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초등학생 5학년인 큰 녀석은 벌써 콧수염이 슬슬 보여면서 아빠한테 면도는 언제 해야 하냐고 묻지만, 자는 모습은 또 마냥 아기 같다. 반에서 키가 가장 큰 우리 둘째는 아직도 알파카 인형을 끌어안 고잔다. 항상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우리 둘째는 몸은 컸지만 엄마가 잘때 같이 있어주지 못하니 애착 인형에 더 집착하는 것 같아 또 괜히 짠하다. 늦은 잠까진 충분히 재우고 오늘은 주변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숙소 앞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7 올레길 들어가는 초입은 내 키에 두배는 되어 보이는 현무암 돌담이 애워 쌓여 있었다. 그 좁고 높은 벽사 이를 아슬아슬 걷다 보면 한순간에 벽은 사라지고 눈앞에 탁 트인 바다가 순간적으로 펼쳐진다 그 드라마틱한 순간을 위해 돌담이 세워진 것이라면 그 어떤 예술품 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돌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들과 저 멀리 보이는 문섬과 쏟아져 흐르는 구름까지 자연의 장엄함과 벅차오름이 한데 어우러져 와-라는 말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세상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이게 결국 메타버스의 세상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실의 나는 순간 사라졌다.

오랜만에 만나본 자연의 이 풍성함은 도시 속의 나를 삭제시켜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큰아이는 핸드폰을 보고 있고, 둘째는 식물들을 그렇게 꼼꼼히 보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광경에서 어떻게 바다를 안 볼 수가 있는 거지? 무엇이 바다보다 너희를 이렇게 감동시키는 거니 라는 생각에 그들의 행동을 관찰해 보았다,

첫째는 이광 경과 엄마와 동생의 행동을 영상에 담겠다며 브이로그를 찍고 있었다. 그에겐 바다의 경이 로움보다 바다를 보는 나의 리액션과 동생의 식물 탐구에 빠진 모습이 즐거웠던 것이다. 둘째는 학교 가는 길에 보이는 식물들의 변화도 감지하는 생태 감수성이 뛰어나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감 탐하고 있을 때 더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우와! 엄마!!!"와--이것 보세요! 호들갑에 달려간 그곳엔 엄지손톱만큼 동글동글한 열매가 달려있는 나무가 하나 있었다. 특별할 거 없어 보이는 그 나무를 보며 우리 둘째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같이 감탄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둘째가 말했다.

엄마 후박나무예요!!! 와 이걸 여기서 보다니! 이게 울릉도에서 많이 나는 건데 울릉도 호박엿이 사실은 후박나무 열매로 만든 거예요- 근데 전해져 오면서 발음이 잘못돼서 호박엿이 됐대요, 그래서 지금은 실제로 호박이 들어가긴 한다고 들었어요-그 후박나무를 제주도에서 본 거예요!! 와-- 너무 신기하죠 엄마!

"와 정말 신기하다" 라며 리액션해주었다.

모르는 사람에겐 그냥 스쳐 지나가는 나무일 뿐일 텐데 관심 갖고 바라보면 이 나무 하나에도 이런 스토리텔링이 가능하구나, 맞아, 아는 것이 있어야 창의 적일 수 있는 거야.. 감정에 치우친 나의 즉흥적인 감정의 변화 못지않게 아는 것에서 오는 이성적인 감동을 느낀 아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서울에서 나누던 코로나, 학교 수업 이야기도 물론 너무 좋았지만, 제주에서 나누는 대화들의 카테고리는 다양하고 넓어졌다. 공간과 환경의 중요성. 우리가 누굴 만나고 대화하며, 어디에 자주 가는지가 인생관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 같다. 같은 곳에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고 즐거웠던 그 순간에 많은 생각이 스친다.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저기 구름 좀 보렴 나무 너무 예쁘지 않니?라는 말에 나 또한 시큰둥했던 기억이 있다. "아니 맨날 보는 구름이 뭐 대단하고 나무가 뭐 예쁠게 어디 있어?"라고 말이다. 상황, 나이, 성향에 따라오는 감동의 포인트는 각기 다다르다. 나 또한 그랬고 우리 아이들 또한 그럴 것이다.

그래서 각자 가고 싶은 곳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둘째는 희귀 식물을 관찰할 수 있는 한라 수목원을 가자했고, 우리 첫째는 노트북 판매점에 가서 사고 싶은 새로운 신형 노트북을 보고 싶다 했다. 아이들이라고 마냥 워터파크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엄마가 너무 안일했다!

제주도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에 신나기도 하지만, 애들아! 엄마도 미술관 투어 하고 싶은데-! 서두르진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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