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3일 차
계획 없이 무모하게 시작된 제주살이여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두 아들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계획을 세우면 20일 동안 문제없다 생각되어 항공권과 숙박 예약 말고는 특별히 한 것도 없었고, 뭘 어떻게 계획해야 하는지 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제주도는 주로 3박 4일 일정으로 주로 움직여서 인지 제주도에 올 때마다 촘촘하게 움직였었고,
그러다 보니 좋은 풍광도 사진에 담기 바빠 제 대로 눈으로 즐기긴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아이 아빠 없이 혼자 운전하면서 아이들과 제주를 누비다 보니 운전 중에 만나는 겹겹이 쌓인 웅장한 구름,
스치듯 만나는 초원 위의 말들, 도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있는 동화 속 정원을 그저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도 눈앞의 감흥을 그대로 담을 수 없다 위안 삼으며, 사진을 못 찍는 순간의 아쉬움보다는 눈앞의 감동을 즐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초보 운전자는 운전 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제주 지도를 크게 붙여놓고, 다음날 계획을 아이들에게 맡겨버렸다. 귀찮고 힘들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서로 상의도 하고 동선도 짜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운 순간이었다. 몇 번 계획을 하다 보니, 첫째는 먹고 싶은 게 확실했고, 둘째는 가고 싶은 곳이 확실했다.
첫째 덕분에 평대 해변 근처 맛있는 한치 튀김도 먹어보고, 전망 뷰가 좋은 유명한 망고 빙수 집도 갈 수 있게 되었다. 평대 해변 근처 "평대 스낵"에서 맛본 한치 튀김은 정말 엄지 척이었는데, 우리 뒤로는 수량이 다 떨어져서 주문을 못 받는다는 말에 아이들은 본인들이 계획한 일정표와 동선이 대단히 완벽했다고 믿는 눈치였다. 떡볶이 그릇을 비우고 든든하게 아니 당당하게 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너무도 완벽했다.
둘째 덕분에는 희귀 식물이 많은 한라수목원에서 제주에서만 자라는 아왜나무와 깻잎처럼 생겼으나 희귀 식물로 지정되어있는 눈향나무도 볼 수 있었다. 분명 혼자 계획했다면 가보지 못했을 곳들 이였다.
지도에 나와있는 지형 위주의 코스는 대부분 인스타그램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목적지들이 대부분이 여서 그토록 한적하게 비대면 관광이 가능한 것에 감사했다.
처음 보는 나무와 식물을 발견할 때마다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며 내겐 네가 보물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카메라에 담았다.
사실 아이들이 취학 전에 몇 번 제주 여행을 온 적이 있었는데 아이 아빠는 업무로 바빠 일정이나 계획을 세울 수 없었고, 아이들과 함께 갈 곳을 오롯이 내가 정하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일정으로 고민해서 예약을 하느라 여행이라기보다는 극한 훈련에 가깝다고
느꼈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해안도로 바다 뷰와 오름에서 보이는 일몰만으로 여행을 만족해야 했고 체험위주의 일정으로 하루하루 쏟아지는 피로감은 주체가 안되었었다.
내가 주도적으로 여행을 계획했었지만 그 계획안에 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각자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이 뚜렷해진 요즘, 여행지에서의 각자의 역할도 뚜렷이 나누어졌다.
아이들이 능동적으로 계획하는 하루하루는 설렘과 두려움 그 사이 언저리였다.
제주도에서 이틀 연속으로 떡볶이와 햄버거에 취해 있었고, 운전으로 지친 나는 이틀에 한번 꼴로 카트레이싱을 해야 했다. 숙취 후 미로공원놀이로 어지럼증도 물론 있었지 난 여행에서의 일정 짜는 피로도는 덜 수 있었고, 뭐든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여행에 익숙했던 나로선 즉흥적인 여행이 얼마나 대담하고 모험적인가 알게 되었다. 물론 체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아이들에게 하루 한 끼는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먹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정도는 들어줘야지 라며 윙크를 하는 한쪽 눈이 그렇게 무거웠지만, 성공적으로 협상했다.
평소 집에서는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학교 학원 일정 등에 따라 매일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의 이동하던 아이들은 여행지에서 확실히 그들의 색다른 면모가 보였다.
새로운 곳에 호기심뿐 아니라 본인이 능동적으로 계획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을 반복하면서, 본인의 역할을 하나씩 만들어 갔다.
어떤 업무나 프로젝트 상황에 따라 각자의 역할이 달라지곤 한다. 몇 번 실행해보고 계획을 세우다 보면 빠르게 내 위치는 어디고 남들보다 내가 무엇이 탁월한가를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을 자주 만들어 주고 학습해 보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또 한 번 느낀다. 수업도 업무도 비대면으로 해내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이런 학습의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럴 때일수록 나 자신을 자꾸 새로운 환경에 노출시켜 나의 포지션을 나의 강점을 파악하는 일들을 자꾸 만들어 내야 함이 필요하다. 여행이든 온라인 모임이든 삶의 한 부분을 조금씩만 틀어서 달리 해보면 무수한 새로운 인사이트가 쏟아지곤 하는데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직관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직관성과 순발력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 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제주살이의 시작점에서 아이들과 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생각의 깊이 또한 깊어진다.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앞으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