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쏟아내고도 짜내고 있는 하루
퇴근시간이 훌쩍 지난 7시 35분이 지날 무렵,
분주한 내 키보드 타자 치는 손위로 명함이
후드득 떨어진다
먹다 남은 초콜릿과 껍질이 뒤엉켜진 서류 결재판 옆 다이어리위에는 오늘 미팅 때 받은 명함을 쌓여 있었다.
아슬아슬하게도 그위에 내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면서 손등으로 명함이 채근대는 적막 속 사무실이었다.
진동을 멈추기 위해 옆으로 버튼을 밀고 나니 다급한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 엄마, 코난 영화가 새로 나왔대요!
언제 보러 가요?”
“ 그런데 오늘 학교 앞 문구에 갔었는데 내가 뽑은 뽑기가 제일 멋졌던 거 알아요?”
“ 그리고 거기서 오늘 콜라 볼을 2개 사 먹었는데
되게 맛있어요"
“ 오늘은 엄마가 그림 그린 거 동영상으로 찍어서 올리고 싶은데 뭐 그릴 까요?”
일방적인 질문세례에 영혼없는 답변을 끝내고 난 뒤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내 얼굴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얼룩진 화장과 함께 밑 낮을 드러낸 내 얼굴은 청순하기를 뛰어넘어
자고 일어난 듯한 내추럴한 마스크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게 쏟아진 일들이 꿈이어도 좋겠다는 막연한 상상에 피식 웃었을 뿐인데, 벌써 1층이다.
혼자 있을 아들 녀석 생각에 급하게
지하철역까지 뛰는데,
이렇게 하이힐을 신고 잘 뛸 거면서 고등학교 체력장은 왜그렇게 바닥이었나 싶다.
개찰구에 도착해서 급하게 카드를 댔는데 자꾸 오류가 났다. 3번째 찍을 때 사원증을 터치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가방 속에 손을 넣고 휘휘 저어 카드 지갑을 찾는데.
커다란 가방 속에 출근용책과 퇴근용책 두권만 있었으면 다행인 것을,
회사에서 시험에 드는 일이 생기면 꼭 펼쳐보리라 다짐했던 논어 책까지 세권이나 들어있었다.
출근길 야무진 가방 챙김은 회사 도착 후 단 한 번도 열어보지 못했다.
그냥 지갑 하나만 덩그러니 들고 회사 갔어도 전혀 지장이 없을진대, 왜 그리 가방과 책이 없으면 불안한지.
덕분에 어깨 죽지만 늘어져 갔다. 그래 퇴근길에 좀 마음 챙김을 해보자 하고 논어 책을 집어 드는데,
뭔가 생경한 그립감이었다. 책 사이에 뭉툭한 게 껴있나 본데, 펼쳐보니 리모컨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아들들의 티브이 시청을 자제시키려는 나의 강한 의지가 출근길에 빛났었던 가보다.
분명 출근길도 정신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참 많이도 챙기고 많이도 고민했다는 생각이 든다.
곱절로 바쁘게 집에 가는 길, 온몸이 너덜너덜 해지고 벗겨진 느낌은 지워진 화장 때문일까,
무거운 가방 때문일까,
하얗게 불태워버린 더는 없을 것 같은 하루의 끝이 집에 도착하면 한 커플 더 벗겨질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 퇴근길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기도 전에
녹아버린 헛헛한 설원,
벗겨져버린 화이트가 보인다,